수해현장을 뛴 취재기자 방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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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2년만에 맞는 수해는 수도권을 마비시켰다.
불과 3시간만에 쏟아부운 1백 53mm의 집중호우에 서울시의 수방대책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빗속을 헤맨 취재기자들의 노트에는 수방대책의 문제점, 이재민들의 호소와 원성, 그속에 피어난 미담이 얼룩져 적혀있다.

<본사전용기 위기모면>
한장의 현장감있는 사진을 얻기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풍납·성내동 수해현장으로 날아간 중앙일보사 세스나기는 빗물이 엔진에 들어가 스파크 현상을 일으켜 추락위기에서 겨우 귀항했다.
그러나 생과 사의 갈림길을 모면한 기자는 숨 돌릴새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가 육군구조헬기에 동승, 못다 찍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 철야취재를 하느라 모두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이번 수해는 수도권이 피해지역이다보니 기자자신이 피해 당사자이자 이를 취재하는 격이었어요. J기자는 집이 물에 잠겼는데도 가족들을 돌볼 겨를도 없이 현장을 뛰었지요. 일단 위험고비는 넘겼으니 이번 수해를 정리해보십시다.
- 큰 사건은 토요일을 노린다더니 이번에도 적중했어요. 심상치 않은 빗줄기를 보고 서둘러 츨근해보니 예감대로 였어요. 신사옥으로 옮겨 중앙일보 전화번호가 모두 바뀌었는데도산사태·붕괴 침수 등 제보전화 벨소리가 편집국을 진동하고 있었지요.
- 누군가 핵폭우라고 표현했지만 하늘이 터진것 같이 쏟아붓는 빗속을 뛰다보니 속옷까지 젖어 횹사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됐어요. 특히 토요일은 KAL기 피격사건 1주기가 되는 날이어서 붕괴나 압사현장을 볼 때마다 9월 1일은 「마의 날」 이라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9월 1일은 「마의 날」
- 본격적인 수해는 한강상류 댐의 수문을 열어 유수가 시작된 2일부터 였지요.서울시도 시청상황실에 재해대책본부를 설치했다가 피해지역이 속출하자 재해대책요원을 늘려 시청2층 회의실로 대책본부를 옮기더군요.
이번 수재는 천재라고는 하지만 평소의 수방대책이 완벽했다면 피해는 많이 줄일수 있었을겁니다. 일가족 등 3가구 8명이 회생된 서울 수유동 연립주택 붕괴는 구청등 관계당국의 안전관리대상 위험지역 명단에도 빠져있었어요. 비만 오면 급류로 변하는 개울변의 하천부지에 기초공사도 없이 축대를 쌓고 그위에 철근도 거의 쓰지않은 블록건물을 지었는데도 어떻게 준공검사를 해주었는지 의문스럽더군요. 결국 화를 불러들인 셈이지요.
- 중앙기상대도 마찬가지예요. 호우경보가 늦어 피해가 컸다는 비난이 있자 기상대 관계자들은 밤샘근무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피해만 나면 힘없는 기상대로 화살을 돌린다고 서운해하더군요. 한 관계자는 이번처럼 신속ㆍ 정확ㆍ 과감한 예보는 일찍이 없었다고 가련했어요.
- 해마나 지적된 일이긴 하지만 기상대의 인원보강과 장비현대화가 시급합니다. 노후한 관악내 기상레이다와 일본에서 6시간마다 받는 구름전송사진으로 예보를 해야하는 한계성은 밤샘근무로 극복할 수 없는 고충이지요.
- 수도권 수해는 72년이후 12년만이어서인지 『설마 서울이… 』 하는 막연한 신뢰가 피해를 더 크게 한 것이 아닐까요.
- 그렇습니다. 한 예로 성내ㆍ 풍납동 침수지역에서는 아파트주민들이 설마하며 대피를 미루는 바람에 구조작업이 하오 11시가 넘어서까지 계속됐어요. 우성ㆍ 미주ㆍ 우일아파트등에서는 2일 상오1층이 물에 잠기는데도 2층이상 주민들은 대피를 않고 버티고 있더군요. 2일 하오 물이 불어나고 전기ㆍ 수도·전화가 끊기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모두들 옥상으로 대피해 밤늦게까지 구조대를 바쁘게 만들었어요.

<전기도 끊긴 암흑속에>
- 예전과는 달리 이번 수해지역은 중류층 이상의 주택지여서인지 갓가지 진풍경도 눈에 띄더군요. 특히 성내·풍납동 지역은 모터까지 달린 고무보트를 비치한 집도 의외로 많았고 수해민이 수용된 곳에는 자가용이 20∼30대씩 주차해 있었어요.
- 청사 1층이 완전히 물에 잠겨버린 강동경찰서는 1층 보호실과 유치장에 수감된 피의자와 유치인 60여명을 대피시키면서 남자유치인들은 바지를 벗겨 주위의 눈총을 받기도 했어요. 경찰은 2일 하오 두차례로 나눠 유치인들을 강남경찰서로 이송시키면서 바지가 물에 젖지않게 한다면서 바지를 벗기는 통에 함께 탔던 여자유치인들은 고개를 못들더군요.
- 강동구청도 청사가 침수되는 바람에 제발 등의 불을 끄느라 성내·풍납동 침수지역 주민대피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주민 원성이 대단하더군요. 강동구청 직원들은 1일 하오 10시부터 청사가 침수되기 시작하자 2일 상오 2시 2층으로 대피했어요. 또 재해대책본부도 당초에는부근 성내국교에 설치했다가 침수가 되자 천호 3동사무소로 옮기느라 우왕좌왕했어요.
- 서울시내 침수지역이 1백인 군데나 되는데 피해정도는 얼마나 될까요.

<물바다에 갇힌 고도>
- 정확한 피해집계가 나와야 하겠지만 엄청난 숫자인 겁니다. 육군 구조헬기에 동승해 상공에서 내려다본 성내·풍납지역은 물바다에 갇힌 고도였어요. 강 도로 공터 구별없이 검붉은 흙탕물이 넘실거리고 군데군데 지붕과 건몰 옥상이 작은 섬처럼 떠있는데 자연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할 수 있었읍니다.
침수주민들이 빨간 보자기로 깃발을 만들어 크게 흔들며 다급함을 호소하고 헬기 구조망에 주민을 태워 구조할 때는 대연각 화재사건이 연상돼 간담이 서늘하더군요. 미8군 골프장도 물에 완전히 잠겨 물이 빠진 후에도 앞으로 당분간 사용을 못할겁니다.
- 피해가 컸던 망원동지역은 어떻습니까.
- 이 일대 주민들은 72년 대홍수때 홍수방지를 위해 만들어 놓은 유수지가 오히려 강물을 끌어들이는 파이프 구실을 했다고 울분을 터뜨리더군요.

<주인들 돌멩이 질>
주민들은 수문이 무너져 강물이 유수지로 쏟아져 들어와 인근주택의 침수가 뻔한데도 몇시간동안 관계당국은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유수지로 몰려가 일부주민들은 돌멩이까지 던지는 등 한때 험악한 분위기였어요. 특히 망원동ㆍ 합정동ㆍ 성산 1동 주민들은 방송에서 한마디 경고도 없다가 2일 상오 『강뚝이 무너지고 있으니 즉각 대피하라』 는 구청직원과 경찰의 핸드마이크 소리에 놀라 맨손으로 빠져 나왔다고 발을 구르더군요.
그러나 이 일대는 의외로 침수속도가 느려 2일 하오 5시께에야 허벅지 높이까지 물이 찼어요.
- 수재민 수용시설은 잘돼있었읍니까.
- 갑작스러운 대피혼란으로 수용소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대책본부에서 수해민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다 보니 몇몇 학교에만 이재민들이 몰려 큰 혼잡을 빚더군요. 망원ㆍ합정지역주민이 수용된 성서중학교에는 3천여명이 몰려 교실은 물론 복도에까지 이재민들이 북적됬어요.
-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이재민 수용소에서는 헤어진 가족을 찾는 구내방송이 끊이지 않아 「제2의 이산가족찾기」같더군요. 방송실에는 가족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미아가 많아 어린이를 찾는 부모들의 모습은 주위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어요.
- 어느 사건때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번 수해에도 훈훈한 미담이 많더군요.

<교사가 주민 80명 구조>
- 풍납동 침수지역에서는 민간인 자원구조대들이 2백여명의 주민들을 대피시켰어요. 서울 풍납중학교 장종혁교사(30)는 TV를 보고 있다가 침수피해를 알고 친구 강정수씨 (30·스포츠용구상) 에게 연락해 10마력짜리 6인승 모터보트를 침수지역에 끌고가 2일 하루동안 주민80여뎡을 대피시켰어요. 장교사는 『이 지역에 제자들이 많이 살고있어 도저히 집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고 하더군요.
- 풍납동에서는 한주민이 어른키를 넘는 흙탕물에서 어미돼지 2마리의 귀를 잡고 헤엄쳐나오는데 정말 조마조마하더군요. 물론 자기재산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돼지를 구해 나오자 이를 지켜보던 주민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주는 모습에 왠지 마음이 뿌듯하더군요.
- 아마추어 무선사(HAM)들도 한몫을 단단히 했어요. 망원 1, 2동 이재민 9백여명이 수용된 중동국민학교에서는 2일 하오 6시께 1인당 컵라면 2개씩이 배급됐는데 끓인물이 없어 애를 태웠어요. 이때 자원봉사에 나선 HAM 현성구씨 (28ㆍ 은행원) 가 무선으로 HLøFRC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의 호출부호) 를 불러 온수급수차를 요청해 15분만에 급수차가 도착, 이재민들이 라면을 끓여먹을 수가 있었어요.
- 상도 1동 산64에서는 축대붕괴로 압사직전의 일가족을 구한 용달차운전사가 자신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는 바람에 중상을 입었다더군요. 1일 상오 8시 30분께 이곳을 지나던 고재석씨(36)는 하춘길씨 (40) 가족 3명이 압사위기에 놓인것을 보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하씨가족을 구해나오다 흙더미에 깔려 이가 3대나 부러지고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했는데입원비가 없어 걱정이라고 인근주민들이 중앙일보로 알려왔어요.

<단수되면서 위기감>
- 이번 수해로 직접 피해를 보지않은 시민들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느라 비상식량등을 구입, 서울시내에 라면이 동이 났더군요.
- 요사이 라면이 안팔린다고 제조회사들이 앞을 다투어 선전에 열을 올렸는데 이번수해로 예기치 않은 호경기를 맞은 셈이지요.
- 시민들은 특히 단수가 되면서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압구정동 H쇼핑센터같은곳은 2일 하오 워낙 사람들이 몰려 인파에 밀려다닐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집값 떨어질까 걱정>
침수지역의 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피해주민들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돌리게되자 이젠 집값이 떨어질 것에 모두들 걱정하고있더군요.
특히 망원동일대 주민들은 72년 홍수때 막대한 피해를 보아 상습 침수지로 알려져오다 유수지를 설치, 그동안 「수해안전지역」으로 꼽혔으나 이번에 또다시 침수되자 주민들은 『집값이 크게 떨어지게 됐다』 며 안타까와 했읍니다.
목동ㆍ 신정동 주민들도 신시가지조성으로 한창 들떠 있었으나 『집값ㆍ땅값에 찬물을 끼얹었다』 고 한숨을 쉬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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