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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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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주인이나 종업원이 없는 가게는 어떻게 될까. 곧 망할까. 아니면 장사가 더 잘될까.

누구나 원하는 물건을 가져가고 알아서 값을 치르도록 한다면? 1962년 폴 펠드먼은 이런 질문들에 답이 될 만한 일을 시작했다. 바로 베이글 장사다. 아침마다 펠드먼은 베이글 상자와 돈 받을 바구니를 워싱턴 빌딩가 휴게실에 갖다 놓고, 점심시간이 되면 돈과 남은 빵을 수거했다.

사람들의 양심을 믿는 무인 구멍가게였다. 대금 회수율은 놀랍게도 약 90%였다. 몇 년 후 그는 매주 140개의 회사에 8400개의 베이글을 배달해 예전 직장에서 받던 연봉만큼 돈을 벌 수 있었다.

펠드먼의 양심 구멍가게는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매일 남은 빵과 회수된 돈을 기록했던 그는 규모가 작은 회사가 대기업보다 훨씬 정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100명 이하 사업장은 수백 명이 일하는 대규모 사업장보다 평균 회수율이 3~5% 높았다. 범죄율이 대도시일수록 높고, 시골로 갈수록 낮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펠드먼식 가게가 국내에도 등장했다. 전남 장성군 신촌마을의 '양심 구멍가게'가 그것이다. 새해 언론에 소개된 이 가게는 24시간 '무인(無人)'으로 운영된다. 주인과 종업원만 없는 게 아니다. 도둑도 양심불량자도 없다. 지난해 5월 문을 열었지만 지금까지 1주일에 1000원 넘게 모자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주민들은 제법 짭짤하게 거둔 수익금으로 불우이웃도 돕는다.

구멍가게라는 이름은 한국전쟁 직후 강도가 들끓던 시절, 구멍을 통해 물건을 사고판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불혹이 넘어 처음 책을 낸 동화작가 정근표에게 구멍가게는 '빈곤 속의 풍요'를 파는 곳이다. 삶의 휴게소이자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만물상회요, 동네 사랑방이기도 했다. 소 눈망울만 한 '눈깔사탕'과 '뽀빠이', 불량식품의 대명사 '쫀디기'까지. 그는 자전적 에세이집 '구멍가게'에서 이 모든 것을 한 폭의 서정으로 담아냈다.

이런 구멍가게의 풍경을 바꿔놓은 것은 대형 할인점과 편의점이다. 올 초 영국 더 타임스는 대형 할인점에 밀려 구멍가게가 한 해 2000개씩, 15년 내에 역사 속으로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작고한 시인 고정희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 읊었다. 구멍가게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여백. 새해엔 그 여백이 양심과 정직으로 채워졌으면 좋겠다. 대형 할인점식 '풍요 속의 빈곤'이 아니라.

이정재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