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보단 「선린」기간이 길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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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오는 9윌6일 전두환대통령이 방일한다. 한일양국에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일이다.
내가 해설을 맡고있는 텔리비전 프로그램 「내일의 세계와 일본」에서도 전대통령의 방일을 맞아 두차례에 걸쳐 한국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제1회(9월2일 상오8시부터30분간)는 한국젊은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한글세대의 여름」이고 제2회 (9월23일 같은시간대)는 한국경제문제를 중심으로 한 「한강기적 10년」을 방송하기로 예정되어있다.
말할것도 없이 한국은 일본이 옛날부터 사귀어온 이웃나라다. 일본고대사를 보면 일본이 문화·기술·사상부문의 상당히 많은 것을 한국에서 도입했다는 것을 알수있다.

<고대 한일왕래 잦아>
지금 일본에는 성덕태자가 상당히 알려져 있는데 신도신화에 의해 이루어진 천황가에 속하는 이 천자는 감히 그 기반을 무너뜨릴 위험을 범하면서까지 불교를 긍정한 것은 한국으로부터 문화와 기술도입을 원활히 하기위한 것이었다.
또 오는 10월6일부터 12월9일까지 국제전통공예 박람회가 경도에서 열리는데 여기에 출품되는 일본전통공예 가운데는 한국에서 유입된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많다. 도자기처럼 한국사람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도 있으며 이들중에는 일본에 정착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썼던 덕천시대에도 한국과의 국교는 끊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이왕조는 정기적으로 사신을 에도(현재의 동경)에 파견했으며 덕천막부는 이들을 일본조정의 사절과 똑같이 최고의 예로써 보냈다. 「조선에서온 사절」이 일본국내를 여행할 때는 연도에 있는 여러 대명(넓은 영지를 가진 무사)들로부터 접대를 받았으며 에도(강호)에서는 최고의 영빈관에서 묵었다. 당시 네덜란드 상관장이 자비로 민간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묵었던 것과는 상당히 격차가 있는 우대였다.
덕천시대, 특히 이 시대 전반기의 일본인들은 한국의 문화에 깊은 경의를 표했었다. 특히 유학분야에서는 한국학자를 스승으로 우러러보는 일본인도 적지않았다. 유학을 좋아했던 「도꾸가와」(덕천강길) 장군을 받들고 있었던 「야나기자와」(유택길보)등도 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말을 배운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과 한국간에는 몇차례의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 특히 20세기 전반 36년간에 걸친 불행은 두나라 국민이 잊을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리들 일본인들은 그것을 깊이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한일교류의 오랜 역사에서 보면 가까운 이웃으로 사귀어 왔던 시기가 훨씬 길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은 서로 이웃이 되어 살게되는데 여기에는 많은 편리함도 있고 여러가지 마찰도 생긴다.
국가와 민족도 마찬가지다. 세계역사를 보면 인접한 나라나 민족사이에서는 불행한 사건이 수없이 반복되어왔다.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독일과 러시아, 러시아와 터키, 아니 독일민족끼리도 싸움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한 역사에 비하면 이웃인 일본과 한국과의 오랜 선린우호의 역사는 자랑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할수 있지 않은가.

<일, 20년간 20배 성장>
한국은 지금 4년후의 서울올림픽을 목표로 거국적인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그 모습을 보면 동경올림픽 직전의 일본을 생각케한다.
동경올림픽이 있기 4년전인 1960년은 내가 동경대학을 나와 통산성에 들어간 해이다. 당시 일본은 패전에서 다시 일어나 전후부흥도 가까스로 일단락, 경제고도성장이 시작되던 참이였다.
그때 일본의 인구는 9천8백만명, 국민총생산은 12조5천5백억엔 이었다.
그 무렵의 환율로 환산하면 국민1인당 GNP는 겨우 3백56달러였다. 이 해의 수출은 40억5천4백만달러, 수입은 44억9천l백만달러로 무역수지·경상수지 모두 적자였다. 더구나 일본의 수출품은 섬유·잡화·트랜지스터 라디오등 노동집약적인 중소기업제품이 많았던 반면 수입품은 국민생활에 불가결한 원자재·연료·식량이 대부분이었다.
요컨대 1960년 당시의 일본은 오늘에 비해 경제규모가 20분의1정도밖에 안되었으며 산업체질이나 국제경쟁력도 아주 취약했다.
그러나 당시의 일본인에게는 모두 일치할 수 있는 꿈이 있었다. 「거대한 선진국」 아메리카의 풍요로움을 자기자신에게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예로부터 일본인들은 국가의식이 희박한 국민이지만 세상분위기에는 쉽게 도취돼 「풍요로움」을 선이라 하여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근면과 축재를 미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꿈을 추구하는 노력이야말로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을 달성시킨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외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일본인의 근면함과 축재열이 일본정부의 강제에 의한 것으로 자주 오해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어떤 이익유도나 벌칙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심을 받기조차 했다. 내가 통산성에 근무한 18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불쾌한 논의를 구미사람들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경우가 여러차례 있었다. 개인이나 국가나 급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어떻든 오해받기 쉬운 것인지도 모른다.
큰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서울의 88올림픽은 일본에 있어서의 동경올림픽과 비슷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 한국은 경제·문화의 커다란 발전시기에 있다.
전두환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선진조국정책」은 전국민의 총의를 결집, 나라만들기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예전의 일본의 소득배증계획(물론 내용이나 정황은 다르지만)과도 비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도 20년후에는 세계제1류의 선진국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근면함과 현명함을 놓고 본다면 충분히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는 결국 여러나라와의 사이에 여러가지의 조정이 필요하게될 장면도 나올 것이다. 그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한국을 보다 잘 이해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일인, 한국 잘몰라>
일본은 경제성장에 열중한 나머지 일본의 문화와 풍습을 제외국에 이해시키는 노력이 늦어졌다. 이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는 상품명밖에 알지 못한다는 구미인이 상당히 많은데 이점을 지금 일본인들은 깊이 반성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일본과 한국간의 교류는 길고 깊지만 금일의 한국문화와 풍습에 대해 솔직히 말해 많은 일본인들은 무지한 상태다. 물론 그 책임은 일본인측에도 있지만 한국의 현상을 알 재료가 부족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옛문화나 전통예술에 대해서는 훌륭한 전시회나 공연기회가 있지만 현대문화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이 점에서 나는 하나의 꿈을 갖고 있다. 내가 관계하는 「오오사까(대판)21세기 계획」의 일환으로서 재일한국인이 많은 오오사까의 거리에 「리틀 서울」이라고도 할 한국의 문화와 생활을 보여주는 멋있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아름답고 시원하게 한국의 모습을 실물로 보여줄수 있는 거리다. 여기에는 한국의 정치, 기업의 협력도 필요하다. 바로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의 일본인가를 멋있게 꾸미기 위해 일본대기업의 협력이 필요했던것 같이 말이다.
일본과 한국간에는 불행한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분명히 오랜 선린외교의 시대가 있었다. 한일양국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나쁜 과거보다 보다 좋은 미래가 아닐까. 전대통령의 방일이 한일 신시대를 열것을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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