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고 싶지 않은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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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짧은 장마 끝에, 여름은 유난히 길고 무더웠다. 소나기 한줄기 없는 불볕 더위에 10년을 부채 바람으로 더위를 쫓으며 살아온 나는 드디어 선풍기를 들여놓고 정작 더위보다는 더워 죽겠다는 비명에 더 질려 이럴 땐 차라리 단순노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이 생산적이리라 생각했다.
이삿날이 정해졌기에 짐을 꾸리는 일이 급선무이긴 했다.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자고단단히 마음먹고 내깐에는 이른바 10년 묵은 살림의 정리라는 것을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삿짐을 쌀 때는 집안 곳곳에 박히고 숨어 있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그 남루함이, 초라함이 낱낱이 끌려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에 혹자는 역사라는 의미를 붙이기도 하고 혹자는 치부라고 부끄러워하며 굳이 감추려고 애쓴다.
우리집 역시 그렇다. 정리벽도 없으면서 쉽게 버리지도 못하는 습성 때문에 (나는 그것을 소유욕이 아닌 추억 때문이라고 변명하지만) 쌓인, 손때 묻고 길들여진 물건들에 묻혀 일말의 서글픔을 지우기 위해 『이번엔 정말 정리하는거야』라고 소리내어 말해 본다. 지나간 것, 지나간 시간들을 들추고 더듬으며 머뭇거리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다시는 찾지도 열지도 않으리라. 매장하듯 상자를 테잎으로 봉하고 노끈으로 단단히 동인다.
얼마큼 편안하고 익숙해진 자리나 관계가 또다시 위기로, 불편함으로 느껴져 쌀읕 씻다가, 빨래를 하다가, 혼자 길을 걷다가 쉼없이 이게 아니다, 아니다를 내뱉으며 고개를 젓게되고, 그래서 새로이 살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인간적인 미성숙이거나 생에 대한 자신없음, 혹은 열성과도 한 가닥 끈이 닿은 얘기가 될 것이다.
렌즈의 작은 초점으로 태양열을 끌어들여 불씨를 만들듯 자신의, 가슴과 눈이 명징한 렌즈가 되어 우주를, 삼라만상을 살아감의 그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두 손 두발 틀에 묶였다는 암담함으로 전전긍긍 살아온 자신을 버리듯 과감히 이삿짐 정리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망가진 장난감과 모아놓은 그림첩을 버릴 때는 예기치 않은 망설임이 따랐다.
벽에서 먼지 앉은 액자를 떼어내며 그 걸렸던 자리, 바래지 않은 직사각형의 선연하게 흰 자국에 잠시 가슴이 시리다. 시간은 쌓이는 것인가, 순간순간 무(무)로, 소멸로 스러져가는 것일까.
오정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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