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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은 육체 아닌 정신의 산물” 우리 시대 발레의 마지막 전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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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호 06면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Maya Plisetskaya)가 2일 89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전설이었고, 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인 동시에 배우로도 활동했던 다재다능한 무용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이를 잊고 놀라운 기량을 발휘한 춤꾼이었다. 2005년 80세 생일을 기념하는 공연 무대에 섰던 그는 내년 90세 생일을 위한 갈라콘서트를 준비 중이었다. ‘춤은 육체가 아닌 정신으로 추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평생 무대에서 떠나지 않았던 마야는 단연 이 시대 발레계의 ‘마지막 전설’임에 분명하다.

2일 타계한 발레리나 마야 플리세츠카야

1925년 모스코바에서 태어난 마야는 외삼촌 아사프 메세러 등 외가의 예술적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인민의 적’으로 낙인 찍혀 처형당하고,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3년간 지내게 되면서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발레가 유일한 희망이었다는 그는 혼신을 다해 춤을 췄다. 그 결과 볼쇼이 발레학교 졸업과 동시에 볼쇼이 발레단에 입단했다. 군무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주역급으로 선발되는 기적적인 행운을 거머쥐기도 했다.

더구나 그에겐 타고난 강점이 있었다. 큰 키, 긴 팔다리의 체격 조건에다(둘 다를 갖긴 매우 어렵다), 유연성과 힘을 모두 갖췄다. 발레단 내에서 순식간에 진급할 수 있는 무기가 됐다. 62년에는 갈리나 울라노바가 은퇴하면서 드디어 볼쇼이 발레단의 최고의 자리 ‘프리마 발레리나 압솔루타(prima ballerina assoluta)’에 올랐다.

마야는 90년 볼쇼이 발레단을 떠날 때까지 수도 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매 작품마다 자신이 맡은 역할에 강한 연극성을 부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백조의 호수’ 오데트-오딜 역, ‘돈키호테’ 키트리 역은 으뜸으로 꼽힌다. 부드럽고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강하고 개성 넘치는 연기로 희노애락을 담아냄으로써 발레리나로서는 보기 드물게 관객에게 선뜻 다가서는 감성표현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무대만은 좁았다. 때로는 볼쇼이 발레단의 운영에 대해 용기있게 비판하기도 했고, 객원 예술가로서 러시아를 벗어나 세계무대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모던발레의 거장 모리스 베자르와 친분이 두터워 그의 안무 ‘볼레로’에서 명연기를 보여주었다. 베자르는 물론 롤랑 프티, 유리 그리가로비치 등도 그에게 바치는 헌정작을 안무했다. 무용계 밖에서도 사교에 뛰어났다.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뎅은 뮤즈인 그의 의상을 도맡아 디자인했으며, 정치인 로버트 케네디, 배우이자 감독인 워렌 비티와도 잦은 교류가 있었다.

발레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해도 두려움이 없었던 그이지만, 아버지를 처형했던 스탈린 앞에서 춤을 추어야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당시 객석 어딘가에 있을 스탈린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고, 무대에서 평생 가장 많이 떨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의 탁월한 집중력으로도 증오심을 이기지는 못했던가 보다.

그는 72년 유명 작곡가인 남편 로디온 쉐드린(83)과 함께 무용 ‘안나 카레니나’를 창작해 초연하기도 했다. 이렇듯 무용수·안무가뿐 아니라 로마 오페라 발레단, 마드리드 국립발레단 예술감독으로서 뛰어난 행정력을 보여주여준 마야 플리세츠카야. 무대의 안팎에서 보여준 열정은 아마도 나이를 초월해 그녀를 움직인 가장 큰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90세 생일 축하공연을 기획하던 마지막 순간까지 발레는 곧 그녀의 삶이고, 무대는 그녀의 안식처였다.

글 장인주 무용평론가 cestinjoo@daum.net, 사진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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