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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일본 제국주의 후진 정치가 금융위기 잉태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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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호 20면

1907년 금융공황 당시 뉴욕 증권거래소 앞. 이때 JP 모건은 재력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금융시장을 회복시켰다. 그가 최종 대부자 기능을 수행한 것은 좋았으나, 그 와중에 철강회사인 US 스틸사 주식을 헐값으로 챙겨서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이런 일을 막고자 의회는 1913년 오늘날의 연준(Fed)을 세웠다. Fed는 ‘공정한 최종대부자 기능의 수행’을 지향하며, 이를 위해 평상시 지급준비금을 관리한다.

경남기업을 둘러싼 의혹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하지만, 그 말들이 전부 사실이라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사업가의 검은 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가고 그 대가로 특혜가 주어지는 정경유착은 정치후진국에서 쉽게 관찰되는 풍경이다. 과거 미국에서도 그런 일은 흔했다.

⑫ 일제 강점기 금융공황의 원인

1907년 금융공황은 오늘날 연방준비제도(Fed) 설립의 계기가 된 큰 사건이었다. 그 발단은 뉴욕에서 세 번째로 큰 니커보커 신탁회사(Knickerbocker Trust Company)가 콜시장에서 거액의 자금을 빌려서 주식 투자에 나섰다가 파산한 데 있었다. 사건의 주범 찰스 모스(Charles Morse)는 공금유용과 주가조작으로 15년형을 선고받으나 돈의 힘으로 3년 만에 출소했다.

모스는 일단 교도소 군의관을 매수하여 자신이 신장병으로 곧 죽는다는 진단서를 쓰게 했다. 그 다음에는 언론을 매수하여 동정 여론을 조작하고, 마지막으로 대통령 측근들을 움직여서 특별사면을 얻어냈다(1912년). 다시 세상에 나온 뒤에는 보란 듯이 더욱 왕성하게 사업을 벌였다. 의회와 행정부 인맥을 이용하여 군납업체로 선정된 뒤 정부에 군함을 팔면서 21년을 더 살았다. 퇴임 뒤 속은 것을 안 태프트 대통령과 국민이 분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정경유착이 더 분명한 경우도 있다. 20세기 초 미국 연방정부는 모든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면서 국유지의 유전관리권을 해군에게 맡겼다. 1921년 하딩 대통령은 취임 직후 헌법상의 행정명령권을 발동하여 유전관리권을 내무부로 옮겼다. 대통령의 포커 친구 앨버트 폴(Albert Fall) 내무장관이 졸랐기 때문이다. 권한을 넘겨받은 폴은 기다렸다는 듯이 티포트 돔(Teapot Dome)이라는 유전을 포함한 몇 개 국유지의 독점개발권을 특정 업체에 헐값으로 넘겼다.

입찰도 거치지 않았던 이 수상한 거래를 ‘티포트 돔 스캔들’이라고 한다. 여론의 압박 속에서 수사가 시작되자 현직 검찰총장의 최측근이 자살하고, 독점개발권을 넘긴 폴 장관은 수뢰사실이 밝혀져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국민의 지지도가 땅에 떨어진 하딩 대통령은 재선을 의식하고 1923년 전국순회여행에 나섰으나, 객지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하딩 행정부는 자원개발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로도 임기 내내 잡음이 많았다. 알 카포네의 마피아가 활개치던 어둠의 시대였다.

티포트 돔 스캔들로 미국이 한참 시끄러울 때 일본에서도 음험한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관동대지진이었다(1923년 9월). 지진 직후 일본 정부는 발권력을 통해 재해복구에 나섰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기업의 어음을 거래은행들이 할인하면, 일본은행이 이를 다시 할인토록 한 것이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일본은행의 손해는 정부가 1억 엔 이내에서 보상키로 했다(일본은행 진재어음 할인손실보상령).

티포트 돔 스캔들을 풍자한 1923년의 정치만평. 미국 정치 역사에서 최악의 정경유착으로 기록된 이 사건에서 자신은 관련 없다고 발뺌하기 바쁜 대권후보들의 모습을 풍자했다.

경제 회생의 탈을 쓴 재벌지원
이런 계획에 반대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이 대책에 따라 구제 대상으로 지정된 스즈키상점(鈴木商店), 구하라상사(久原商事), 하라합명(原合名), 다카다상회(高田商會) 등은 지진피해기업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중 투기적 경영과 과도한 배당으로 부실을 키운 독점재벌들이었다. 반동공황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있었던 그 회사들에, 지진은 오히려 호재였다.

부실 대기업 지원은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주로 식민지에서 은밀히 처리되었다. 지진 발생 6개월 동안 지원된 총 4억3000만 엔의 자금 중 1억5000만 엔이 조선은행과 대만은행을 통해 나갔다. 한시적 성격의 그 자금은 3년이 지난 1926년 말까지도 회수될 기미가 없었다.

‘진재어음 문제’, 즉 지진을 빌미로 시작된 금융기관의 심각한 부실은 일본 경제의 만성적인 불안요인이 되었다. 그래서 대장성은 1927년 1월 대책을 내놓았다. 정부가 연5% 금리로 10년 만기 공채를 발행하고, 이 공채를 은행들이 보유하는 악성 진재어음과 맞바꾼다는 내용이었다(진재어음손실보전공채법안).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높이겠다는 이 계획은, 그간의 금융부실을 기정사실로 인정했지만 총 규모와 문제의 근본 원인은 설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야당이 순순히 동의할 리 없었다. 야당인 정우회(政友會)는 진재어음 해결을 위한 공채발행을 “모리정상배와 불량은행 구제를 위한 것”이라며 극렬히 반대했다. 그리고 진재어음의 정확한 규모와 채무자, 보유은행 명단을 요구했다. 가타오카(片岡直温) 대장상이 그를 거부하자, 의사당 안에서 여야 의원 간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만 흘렀다.

3월이 되자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예금인출요구로 시달리던 도쿄와타나베은행(東京渡辺銀行)의 전무와 상무는 3월 14일 아침 대장성을 찾아갔다. 그리고 이 은행이 자금부족으로 어음결제가 자꾸 지체되고 있어 곧 휴업해야 할 판이라고 실토했다. 하지만, 그날의 어음교환결제는 무사히 넘어갔다.

중의원 예산총회에 참석하고 있던 가타오카는 그 사실을 몰랐다. 이 은행의 상황이 오히려 야당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라고 판단했다. 그는 의회 단상에 올라 “도쿄와타나베은행도 지금 어음결제 불능상태다”고 발표했다.

희귀서적들이 가득한 뉴욕 소재 JP 모건 도서관의 모습. 모건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던 이 방으로 맨해튼의 주요 은행장들을 불러 모은 뒤 협조융자를 통해 금융시장 회복방안이 나올 때까지 그들을 감금했다. 초법적인 행동이었다.

장관의 결정적 한 마디
그것은 그야말로 폭탄선언이었다. 이미 1927년 초부터 일부 지방은행들이 쉬쉬하면서 휴업상태로 들어간 상황에서 이제는 도쿄에서도 은행 휴업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장관이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44개 은행이 휴업에 들어가고, 이후 파산하는 은행들이 속출했다. 계속되는 경영난 속에서 갑자기 돈줄까지 끊긴 스즈키상점은 4월 5일 끝내 파산했다. 이제는 이 회사의 주거래은행인 대만은행까지 위태로워졌다.

대만은행이 파산하면 조선은행도 흔들린다. 그래서 내각은, 일본은행이 대만은행에 무담보 특별융자하고 정부가 다시 2억 엔 한도 내에서 일본은행을 지원하는 방안을 서둘러 마련했다(대만은행구제긴급칙령). 그리고 4월 13일 이것을 추밀원에 제출했다.

당시 헌법에서는 입법권한이 왕에게 있었고, 추밀원은 의회(중의원)와 마찬가지로 왕의 보좌기구였다. 내각이 부실채권 정리방안을 의회가 아닌 추밀원에 제출한 것은 야당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추밀원도 당시 헌정회(憲政會) 내각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3년 전 발생한 호헌운동 때문이었다.

관동대지진 직후 혼란스런 분위기 속에서 히로히토(裕仁)왕 저격사건까지 발생했다(1923년 12월). 그 일을 계기로 추밀원 의장 기요우라(清浦奎吾)가 친위내각을 구성했다. 그 내각에는 귀족, 군인, 관료 등 온통 임명직만 있고 선출직은 한명도 없었다. 헌정회 소속 의원들은 이것이 위헌이라고 시비를 걸었다(호헌운동). 결국 5개월 만에 내각이 해산되었다.

긴급칙령안을 받아든 추밀원 부의장 히라누마(平沼騏一郞)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여야가 의회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을 추밀원을 통해 왕의 칙령으로 처리하는 것은 위헌”이라면서 내각이 제출한 긴급칙령안을 부결시켰다. 헌법을 들먹이며 기요우라 내각을 붕괴시킨 헌정회 내각에 똑같은 방법으로 한 방 먹인 것이다.

그 다음날 대만은행은 휴업에 들어갔다. 당시 이 은행은 일본 금융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 하루짜리 콜머니만 1억 4000만 엔에 이르렀다. 이 상황에서 대만은행의 휴업은 모든 금융거래의 중단을 의미했다. 이는 1907년 10월 니커보커 신탁회사가 파산한 직후 뉴욕의 콜시장과 똑같았다. 위기를 해결해줄 구원자가 없는, 절망적인 순간이었다.

결국 4월 18일 대만은행 휴업과 함께 와카쓰키(若槻) 내각이 총사퇴했다. 새로 들어선 정우회 소속 다나카(田中) 내각에서 다카하시(高橋是清) 대장상은 이미 두 번이나 그 자리를 맡아 본 사람이었다. 노련한 그는 일단 일본, 조선, 관동주, 만주, 사할린에 걸쳐 3주간 금융기관 지급유예를 선언했다. 그 사이에 정우회 의원들은 자신들이 줄곧 반대해 왔던 각종 금융구제 법안들을 가결했다. 그러자 금융시장은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주 싱거운 결말이었다.

1907년 미국 금융공황과 20년 뒤 벌어진 1927년 일본 금융공황은 모두 예금인출과 콜시장 마비에서 시작했다. 하나의 뿌리는 주가조작이었고, 다른 하나의 뿌리는 정경유착이었다. 어느 것이 더 나쁜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일본에서는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국민과 헌법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무한대립으로 대응마저 늦었다는 점이다. 후진적 정치수준이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하고, 수습까지 방해한 것이다.

그런데, 대지진 이후의 부실여신은 와카쓰키 내각이 아닌, 야마모토(山本) 내각 때의 일이다. 그런데도 와카쓰키 내각은 진재어음의 처리를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조금 늦출 수는 없었을까?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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