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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8. 첫 세계 제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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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레슬링으로 세계를 제패한 장창선 선수의 어머니 김복순씨(왼쪽). 그녀는 콩나물 장사를 해 3대 독자인 장 선수를 키웠다. 오른쪽은 필자.

각별한 애정을 담아 그의 이름을 불러 본다. 스포츠 한국을 빛낸 사나이 장창선. 나의 대한체육회장 시절에 가장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남는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마지막 회상의 주인공으로 장창선 선수를 점찍어 두었었다. 장 선수는 1964년 도쿄올림픽 은메달리스트요, 66년 미국 톨레도에서 열린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 자유형 플라이급의 금메달리스트다. 스포츠에서 한국 선수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장 선수가 처음이었다.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 선생은 일본 대표로 참가했다.

장 선수가 세계를 제패한 날은 66년 6월 16일이었다. 미국 톨레도에서 대회가 열렸을 때 장 선수는 스물다섯 한창 나이에 8년째 대표선수로 활약하면서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 레슬링 경기의 순위 결정 방식은 벌점제였다. 장 선수는 5회전을 끝냈을 때 4승1무를 기록, 승률이 가장 높았다. 그런데 벌점이 일본의 가쓰무라 야스오, 미국의 리처드 샌더스와 같은 3점이었다. 이럴 때는 계체량으로 순위를 가렸다. 사우나로 달려가 땀을 뺀 장 선수의 체중은 가쓰무라보다 5g 적었다. 장 선수가 세계챔피언이 됐다.

장 선수의 영광 뒤에는 어머니 김복순씨의 눈물겨운 사랑이 있었다. 그녀는 인천 신포시장에서 콩나물을 팔아 3대 독자인 아들을 길렀다. 아들이 톨레도에서 세계 정상에 오를 때도 김씨는 콩나물을 파느라 소식을 듣지 못했다. 텔레비전을 본 사람들이 "당신 아들이 금메달을 땄다"고 알려 주고, 방송국에서 "콩나물 장수의 아들이 세계에서 1등을 했다"며 인터뷰하자고 몰려든 뒤에야 아들이 장한 일을 해냈음을 실감했다. 그녀는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결코 교만하지 않았고 아들 자랑 대신 자기 일만 묵묵히 계속할 뿐이었다.

장 선수가 귀국해 비행기 트랩을 내려설 때 김씨의 가슴속에서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장 선수의 어머니는 소박하고 정직한 분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금메달 덕에 콩나물 좌판 하나 마련한 것으로 만족했다. 그때까지 남의 가게 처마 밑을 전전하다가 비로소 시장 한복판에 변변한 자리 하나를 차지한 것이다. 장 선수가 은퇴해 전자제품 대리점을 차린 뒤에도 장 선수의 어머니는 콩나물 장사를 계속했다. 장 선수가 말려도 듣지 않았다. 나는 이 한결같은 마음이야말로 세계적인 스타를 키워낸 어머니의 흔들림없는 사랑이라고 믿는다.

장 선수는 효자였다. 우수선수 강화훈련 때 체육회에서는 선수들에게 하루 목욕비로 50원씩을 지급했다. 장 선수는 이 돈을 모아 어머니께 드렸다. 대회에 나가 우승하면 늘 영광을 어머니께 돌렸다. 장 선수가 귀국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크게 환영 잔치를 벌여 주고 싶었다. 그래서 카퍼레이드를 기획하고 참가자들에게 회비를 받는 '유료 환영파티'도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이 파티에서 92만5000원이 걷혔다. 장 선수는 이 돈으로 인천에 조그만 한옥 한 채를 마련했다. 장 선수의 어머니는 그때서야 다리를 뻗고 쉴 수 있었다.

장 선수는 은퇴 후 박 대통령의 하사금(100만원)으로 택시 한 대를 구입해 운수업을 시작했다. 성실한 사람이어서 큰 실수가 없었다. 이후 스테인리스 그릇 공장과 갈비집을 운영하는 등 사업을 하면서도 국가대표 레슬링팀 감독, 삼성생명 이사 겸 총감독, 대한레슬링협회 전무와 부회장을 거쳐 경기인 출신으로서는 최고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태릉선수촌장까지 지냈다. 내 필생의 역작인 태릉선수촌의 관리자가 된 장 촌장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하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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