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5)학술잡지「신흥」-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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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해(1929년) 7월에 「신흥」이란 학술잡지가 나와서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봄에 대학을 졸업한 경성제국대학의 제1회 졸업생이 주축이 되어 낸 잡지인데, 발행인은 철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전문학교 교수로 간 배상하였다. 집필자는 유진오·권세원·김계숙·조윤제·차석호·배상하 등으로, 편집후기를 보면 <우리의 모든 운동에 과학적 근거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동지표를 주는 것>이 이 학술잡지의 목적이라고 하여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2호, 3호를 발행하면서 고유섭·이희승·김태준 등이 집필하였다.
발행비용 때문에 1년에 두 번밖에 못 내던 이 잡지는 1937년에 9호를 내고 폐간되었는데, 학술논문다운 학술논문이 없던 이 나라에 다소의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말이지, 그때 잡지에 학술논문들이 상당히 나왔고, 특히 좌익 측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전개하는 많은 학술논문이 나왔지만 대부분 학술논문이 아니었다. 일본의 좌경서적에는 독일 말이나 러시아 말의 책을 번역한 것이 많았는데, 그 번역에 오역이 많아서 무슨 뜻인지 모를 글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본 책을 읽고 그것을 번역했거나 거기서 글 구절을 따왔으니 읽어보아야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 태반일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마르크스-앵겔스」의 이론은 여간 공부를 해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아주 난해한 것이다. 이것을 일본말 해설 책이나 잡지 글을 몇 권 읽어 가지고 안다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그 당시에 나온 대부분의 좌경논문이란 것이 모두 이런 식의 의미불통의 글이었고, 더군다나 남의 굴을 인용했으면 주가 있어야 하는데 주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런 때에 「신흥」에 실린 논문은 그 내용이 탁월한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논문은 이렇게 쓰는 것이란 것을 보여준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유진오는 이밖에 형법연구실 조수로 있으면서 동창인 이종수·김계숙·최창규 등과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조직해 창덕궁 아래 전주 이씨 종약소 위에 사무실을 차리고 간판을 걸었다.
이 연구소는 일본의 대원사회문제연구소를 본떠서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사상의 모든 분야에 걸쳐 조사와 연구를 해서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자는 데 숨은 목적이 있었다.
최×달·이×국·박×규는 그때학교를 졸업하지 않아서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그러나 정식회원과 같이 이 일에 참가해 유진오와 함께 우선 「조선사회운동사」를 각기 분야를 나누어 공동집필로 원고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 단체는 어디까지나 학술단체이지 어떤 행동을 목표로 한 단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정찰은 이 단체를 노려 32년 6윌 서대문경찰서형사대가 이 연구소를 습격해 모든 책·신문·잡지·서류 등을 압수해 가져가고, 이 연구소의 주재자인 유광오의 가택을 수색한 뒤 유진오를 서대문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것으로 29년에 발족했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는 소멸됐는데, 그 전해인 31년에 경성제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제동맹사건이 있어서 이 사건의 영향으로 조선사회사정연구소도 없애버린 것일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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