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레리나들 역동적 공연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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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레닌그라드 발레 학교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연습할 때가 떠오릅니다. 그때 식탁에 빵과 마실 것이 소품으로 놓여 있었죠. 다들 춤보단 어떻게 빨리 식탁에 가까이 가 빵을 먹을까 궁리했어요. 혼도 많이 났지만 즐거운 시기였지요."

누가 사람은 추억을 먹으며 산다고 했던가. 문득 그의 눈이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살아 있는 발레 역사'라 불리는 세계적인 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78)가 한국에 왔다. 5년 만이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백발, 매서운 눈빛, 카랑카랑한 목소리…. 언뜻 보아도 '이 노인네 꼬장꼬장하겠다'란 느낌이 확 들었다. 그러나 '꼬마' 나 '유년기'가 화제에 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천진스런 표정을 지었다. 거장도 아련한 과거 앞에선 약해질 수밖에 없는가 보다.

그는 23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막이 오르는 국립발레단(단장 박인자)의 '호두까기 인형'의 안무를 점검한다. 그가 고전 발레를 재해석해 만들었던 안무를 국립발레단이 어떻게 무대에 옮기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주연을 맡은 김현웅(24)씨는 "선생님 앞에서 숙제 검사 받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입단 3개월 만에 주역을 꿰찬 이시연(21)씨도 "처음엔 기뻐서 잠을 못 잤고 지금은 너무 떨려서 못 잔다"고 토로했다.

그리가로비치는 "어제 한국에 와 국립발레단 단원들의 준비 상황을 아직 보진 못했다. 그러나 5년 전에 그랬듯 역동적인 무대를 꾸밀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리가로비치와 한국의 인연은 각별하다. 1980년대 한국무용가 김매자씨와 친분을 쌓기 시작해 2000년 한국에 와 1년여간 국립발레단을 직접 지도했다.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스파르타쿠스' 등 세 작품을 연이어 선보였다. 무용 칼럼니스트 장인주씨는 "그리가로비치로 인해 러시아 발레의 정통 테크닉이 비로소 한국에서 숨쉴 수 있게 됐다. 무대나 의상도 한단계 업그레이드됐다"라고 평가했다.

곧 팔순이지만 그는 여전히 바쁘다. 크라스노다르란 도시에서 단원 100여 명 규모의 그리가로비치 발레단을 운영하고 있다.

내년엔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볼쇼이 극장에서 '황금세대(golden age)'란 작품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신작도 구상 중이란다. 문득 그의 손을 거쳐간 수많은 발레리나 중 누가 가장 기억에 남을까 궁금했다.

"40년대 활동한 갈리나 울라노바죠. 나보다 한참 선배입니다. 내가 안무한 작품에선 누군가를 한 명 딱 꼬집어 얘기할 순 없습니다. 다른 발레리나가 가만히 있지 않을테니깐요. 저도 이제 주위를 살필 나이입니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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