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평화도 전쟁도 없는' 동아시아 안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평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할 것 같지도 않다.” 프랑스의 저명한 사상가 레몽 아롱이 핵 대결로 치닫던 1960년대 냉전기 유럽의 안보 정세에 대해 내린 진단이다. 상호불신과 적대감에 휩싸인 미국과 소련이 제도화된 평화를 구축하기는 어렵겠지만 핵 억지력과 상호확증파괴(MAD) 때문에 둘 사이에 핵전쟁이 벌어질 개연성 또한 낮다는 것이다. 예리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지난주 유럽외교협회 초청으로 베를린·파리·바르샤바 세 도시를 돌면서 각국 정부 당국자 및 전문가들과 토론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주제는 ‘중국의 부상과 동아시아 안보의 미래’였다. 놀랍게도 동아시아의 안보 상황에 대한 유럽 전문가들의 진단은 아롱의 말과 그대로 일치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과 그에 따른 전략적 모호성 및 불확실성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미국이나 일본이 떠오르는 중국의 국제적 지위를 인정하며 평화 공존의 제도화를 모색할 가능성은 아주 작다는 게 이들의 평가였다. 역사적 배경과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 사이의 핵 억지력 때문에 대규모 전쟁이 발발할 개연성은 아주 희박하다고 이들은 분석했다. 동중국해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충돌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섣불리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없을뿐더러 경제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데다 사회문화적 교류 협력이 지속되고 있는 현실도 이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쟁이 가져올 비극적 결과에 대한 인식의 공유 또한 중요한 억지 변수가 되고 있다고 봤다.

 각국에서 편협한 민족주의가 확대 재생산되는 흐름이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국내 정치적으로 관리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남북한 관계나 양안 문제 역시 전면전 양상으로 번지기는 힘들 것이란 추정이 많았다. 한 폴란드 전문가는 “북핵이 암적 존재가 될 수 있지만 이 역시 대규모 전쟁의 출발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개별 국가의 자제, 강대국의 개입, 국제사회의 압력이 맞물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의 과거가 아시아의 미래가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유럽의 시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유럽 전문가가 중국의 부상을 이미 하나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이들은 중국의 경제적 규모와 영향력에 대해 전반적으로 수긍했지만 군사력에 대한 평가는 인색했다. 동아시아 지역 패권을 겨눌 능력은 되겠지만 전 지구적 차원의 동맹 네트워크를 가진 미국과 군사적 패권 경합을 벌이기에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게 이들의 평가였다. 이에 더해 중국 경제의 불확실성, 국내 정치와 사회적 난제들, 국제적 정통성 확보상의 애로점 등도 중국이 패권적 지도국가로 자리 잡는 데 부정적 기제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번 순회 토론회의 핵심 쟁점은 단연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였다. AIIB는 아시아 지역의 열악한 인프라 구축을 위한 공공재 구축에 해당하므로 세력 균형이란 정치 논리와는 구분돼야 한다는 게 이들 유럽 국가의 대체적인 입장이었다. 더구나 창립 멤버로 적극 참여함으로써 국제표준에 부합하는 AIIB의 규범·원칙·규칙·지배구조 등을 만들겠다는 의도도 분명히 했다. 물론 거대한 아시아 인프라 시장에 진출할 기회라는 경제적 편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인 영국·프랑스·독일이 이미 상당 기간 AIIB 가입 문제를 논의해 왔다는 사실 역시 놀라웠다. 게다가 미국과 가장 가까운 영국의 선제적 가입 결정이 다른 동맹국들의 가입을 용이하게 해 줬다는 대목에 와서는 유럽 특유의 실용주의가 빛나 보였다. 한마디로 안보와 관련해서는 미국과의 조율을 기본 원칙으로 삼으면서도 경제 분야에서는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익 극대화 전략을 취하는 셈이었다. 한국과는 사뭇 대비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일부 인사는 나토의 외연을 동아시아로 확장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럽이 동아시아의 직접적 안보 행위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에 과거 헬싱키 프로세스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다자 안보협력과 관련된 아이디어와 제도 확산에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당사자인 우리 못지않게 동아시아 안보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과연 그럴까 하는 반문을 하게 되는 한 주였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