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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휩쓸리는 '폭포효과' 음모론에도 작동돼 멀쩡한 사람도 빠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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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의 캐스 선스타인 교수. 지난 2월 국내 출간된 저서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에서 각종 음모론의 발생 과정, 대처법 등을 살폈다. [사진 21세기북스]

인터넷 검색창에 ‘음모론’을 쳐 넣으면 ‘세계 10대 음모론’이 뜬다. 엘비스 프레슬리 생존설, 미국의 달 착륙이 조작된 것이라는 ‘아폴로 달 착륙의 진실’ 같은 것이 포함돼 있다.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08년 구글에서 인기 있는 음모론을 조사한 결과가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조사 1위에는 미국의 9·11 테러 음모론이 올랐다. 당시 부시 정부가 중동에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알카에다의 테러가 임박했음을 알았으면서도 막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음모론은 멀리 있지 않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토론광장 ‘아고라’ 같은 곳에선 세월호 음모론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정부가 저질렀거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증거 인멸에 나섰다는 주장이다. 지난달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가 북한의 천안함 폭침을 사건 발생 5년 만에 인정한 것도 음모론이 유통되는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음모론은 왜 활개 치는 걸까. 멀쩡한 사람들이 왜 터무니없어 보이는 음모론을 믿는 것일까. 나아가 음모론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의 캐스 선스타인(61) 교수는 그런 질문에 설득력 있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다. 지난 2월 국내 번역 출간된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원제 Conspiracy Theories)』(21세기북스)에서 음모론의 발생과 작동 메커니즘, 정부의 대응책 등을 살폈다. 사회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행동패턴을 이해하고자 하는 행동경제학의 식견을 활용했다.

 선스타인은 베스트셀러 경제경영서 『넛지』의 공동 저자로 유명하다. 2009∼2012년 미국 행정부의 규제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규제정보국(OIRA) 수장을 맡아 ‘규제 차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e메일 인터뷰에서 “한 나라가 이념적으로 양극화되면 결국 음모론이 생겨나게 마련”이라며 “음모론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와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2009년 저서 『루머』 등을 바탕으로 문답을 구성했다.

 -음모론에 대한 책을 쓴 계기가 궁금하다.

 “9·11 테러 여파로 쓴 2009년 논문을 가다듬었다. 2004년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 뉴욕 시민의 49%가 미국 정부가 테러 계획을 사전에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멀쩡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웠다.”

 -멀쩡한 사람이 음모론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은 어떤 판단을 내릴 때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가령 보스턴 마라톤대회 테러의 정확한 발생 원인을 직접 조사해 결론 내리려는 사람이 있을까. 음모론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정보에 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내가 ‘사회적 폭포효과(social cascade)’라고 부르는 신념 형성 과정에서의 쏠림 현상이 음모론을 받아들일 때도 작동한다. 가령 처음 음모론이 뿌리내리기 어렵지 받아들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음모론에 저항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폭포에 접근할수록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처럼 다수의 의견에 휩쓸리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평판에 대해 신경 쓰는 점도 음모론 확산에 영향을 끼친다. 속으로 음모론이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주변 사람 대부분이 음모론을 믿는다면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서 반감을 사거나 애써 얻은 신임을 잃으려 하지 않는다. 고립된 집단이나 네트워크 속에서 왜곡된 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이 음모론에 취약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사회가 할 일은 그들의 정보 고립을 해소해 주는 것이다.”

 -9·11 테러와 같은 대형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이 많은 이유는.

 “분노나 원망을 터뜨리기 적당한 출구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끔찍한 사건에 접한 사람은 분노나 두려움의 감정에 빠진다. 그런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정당화할 근거를 적극적으로 찾게 된다. 누군가에게 사건 발생의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한다. 사건으로 인한 감정이 강렬할수록 음모론의 확산 가능성은 커진다.”

 -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음모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사람은 인식의 균형 상태를 추구한다. 음모론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음모론의 수용과 배척 중 어느 쪽이 자신의 인식 균형을 유지시켜줄지를 따지게 된다. 이때 영향을 미치는 게 기존의 입장이나 내적인 동기다. 그에 따라 음모론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정보량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상당한 근거가 있어야 음모론을 받아들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양의 정보만으로도 쉽게 음모론을 믿는다.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여 기존 입장을 강화하는 성향의 사람은 특히 음모론에 잘 빠진다. ‘절름발이 인식’ 상태인 이들이다.”

 -한국은 진보·보수 이념 갈등이 심각하다. 그런 점이 음모론을 부르나.

 “한국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 일반적으로 사회 양극화는 반대 진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결국 음모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음모론이 반드시 위험한 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아무리 음모론이 널리 퍼져 있다고 해도 전체 인구에 비춰보면 믿는 사람이 소수인 경우가 많다. 또 ‘의사(擬似) 신념’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실제 행동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음모론을 믿는 사람 중 극히 일부만 행동에 나서 테러를 벌인다고 해도 그 피해는 끔찍할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가장 좋은 방법은 팩트(사실)로서 맞서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역시 필수적이다. 음모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음모론을 믿는 집단 내에서 신망을 받는 경우 그 사람들을 활용해 음모론을 바로잡는 시도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 보장이 어떻게 음모론 퇴치로 이어지나.

 “민주주의 사회가 헌법에 따라 보장하는 ‘생각의 시장(marketplace of ideas)’에서 다양한 주장과 해석, 생각이 자유롭게 유통되다 보면 결국 진실이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이다. 많은 국가의 헌법이 그런 낙관적인 전망을 바탕에 깔고 있다. 문제는 사정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가령 미국에서는 1970년대까지 성차별이 만연했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데도 그랬다. 잘못된 신념이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경우다. 인터넷의 보급은 새로운 변수다. 음모론이 퍼지기도 쉽지만 음모론 반박 주장도 빠르게 전파된다. 인터넷 유언비어나 음모론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경계심리도 커져 이전처럼 음모론이 잘 먹히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문화적 전환기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만으로 충분치 않다면 어떤 보완책이 있을까.

 “표현의 자유의 반대편에 있는 법적 가치가 사람들의 명예 존중이다. 명예훼손법을 엄격히 적용하면 표현의 자유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위축효과(chilling effect)’다. 표현의 자유는 물론 양보할 수 없는 가치다. 자유로운 발언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충분히 허용돼야 한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선 적절한 위축효과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음모론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 위축효과가 전혀 없는 사회는 대단히 추악한 곳이 될 것이다. 적정 수준의 위축효과를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바람직한 사회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S BOX] 『넛지』 등 단행본 40권 출간 … 유엔 주재 미 대사와 결혼

캐스 선스타인 교수는 생산성 높은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하버드 로스쿨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그의 이력서(CV)는 자그마치 27쪽에 이른다. 단행본만 40권이 넘고 전공인 법학은 물론 행동경제학 등 관심 분야의 논문이 수백 건에 이른다.

미국의 모든 법학 교수가 그와 함께 공동 연구를 한 적이 있거나 그와 함께 공동 연구를 한 사람과 공동 작업을 한 적이 있을 거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넛지』를 비롯해 백악관 규제정보국 국장직 경험을 정리한 『심플러』 등 각종 단행본 출간을 통해 자신의 전문 지식을 대중과 공유하는 작업에 관심 가져 왔다. 국내에는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등 7권의 저서가 소개돼 있다. 간결하고 알기 쉬운 문체로 복잡한 개념을 깔끔하게 설명하는 게 특징이다.

 그는 현재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맡고 있는 서맨사 파워(45)와 2008년 결혼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워싱턴의 파워 커플 중 하나로 꼽힌다.

 서로에게 어떤 도움이 되느냐고 묻자 선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글쎄, 주말마다 스쿼시를 함께 쳐 상대방이 상당히 훌륭한 체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나는 국제 문제에 관해 아내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아내는 나에게서 행동경제학이나 ‘넛지’에 관한 것들을 좀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백악관에서 함께 일할 때 열린 정부와 관련된 정책 등 몇몇 사안들을 함께 처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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