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의 근작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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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시문학에 있어서 <그리움>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마도 가장 흔히 추구되는 주제들중의 하나일 것이다. 명확히 구분되는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그것을 사적 차원에 갇힌 그리움과 보편적 차원으로까지 자기지양된 그리움으로 나누어본다면, 우리의 관심은 당연히 후자쪽에 주어진다. 그런데 그 보편적 차원에 놓이는 그리움은 초시대적 실체가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적 역사적 실체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특정한 세계인식을 그 구체적 내용으로 갖는것이다.
특히 70년대이후 괄목할만한 심화·확대를 이룬 이른바<민중시>에 있어서, 위와 같은 맥락에서의 그리움은 중요한시적주제로되어왔다. 그것의 근저에는 이른바<근대화>라는 사회·경제적변화가 결코 바람직한것이 못된다는 가치판단이 놓여 있다. 즉 사회·경제의 자본주의적 편성과 산업화가 인간소외 내지 인간상실을 낳는 반인간적 운동으로파악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전자본주의적 농경사회에서의 공동체적 삶의 휴매니티에 대한 동경이 낳아지고, 그 동경은<사라져버린것>에 대한 그리움과<사라져가는것>에 대한 애정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이러한 그리움의 시는 근본적으로 과거지향적 세계이다. 그 과거지향성에는 중요한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미래에의 전방이 확보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미래에의 전망 확보가 포기될 때 그 과거지향성은 그것을 낳는 강력한 현실부정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현실극복에의 의지를 결과적으로 상실하고 패배주의 내지 비관주의로 몰락하기 쉽다.
『세계의 문학』84년 봄호에 발표된 이시영의 시편들은 그리움의 시의 과거지향적 세계가 성취할수 있는 최대치에 접근하면서 위에 말한 문제점을 선명히 드러냄과 동시에, 나아가서는 그 문제점을 뛰어 넘을수 있는 자기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마포를 지나며」와 「무너지는 마을」은, 이시영의 기왕의 작품 세계가 그러했듯이<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과 <사라져가는 것> 에 대한 애정의 세계이다. 빌딩신축공사장의 공사 광경을 보며 시인은, <그러나 엊그제까지만해도 바로 그 자리는 이땅의 가난한 색시들이 앉아 하느님께 따스한 술을 팔고 몸을 받던 곳 그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라고<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을 표명하며 (「마포를 지나며」), 도시 변두리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섬에 따라 그곳 원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이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시인은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아내와 어린 딸을 싣고 돌아오는 저녁 농부의 모습은 아름다왔다 …… 그러나…… 마을은 이제 평화한 옛마을이 아니었다>라고 <사라져가는것>에 대한 애정을 표명하는 것이다. (「무너지는 마을」). 이 작품들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거부라는 의도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 과거지향성으로 말미암아 필경, <철근은 자란다 나무뿌리처렴 쑤욱쑥>(「마포를 지나며」)이라든지<언덕은 무너지고 마을은 곧묻히리라 그들의 오랜 꿈까지도> ( 「무너지는 마을」 ) 와 같은 구절에 잘 드러나듯 패배주의 내지 비관주의를 걸과하고 있음을 간파할수 없다.
한편, 「용마선」 은 이러한 문제점을 뛰어 넘을수 있을가능성을 보여준다. 용산∼마이를 잇는 용마선은, 마포가포름 그대로 나루로서 역할했던 시기와는 달리, 이제 거의 쓸모없는 노선이다. 그 용마선의 굴다리 위에 지금<죽은 듯 멈추어 있>는 화물차는 용마선의 쓸모없음을 표상한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나 멈춘 기차는 달리고 싶다> 고 진술한다. 어디로?<석양의 옛 나루>로. 그곳은<왁자지껄 소금기 묻은 사람들>의 건강한 삶의 공간이다.
그곳은 단순한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에의 전망으로 뒤바뀔수 있을 희원의 세계이다.
말하자면, 패배주의 내지 비관주의를 이겨내려는 의지에 의해 과거지향파 미래지향의 통합이 가능해진것이며, 여기서 그 의지는 강력한 희원의 언어로 향상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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