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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김건 전 한은 총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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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88년 10월 11일 국회 재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는 김건(왼쪽) 당시 한국은행 총재. 고(故) 김 전 총재는 그날 국감에서 “금융통화위원회는 중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밝혔다. 총재가 ‘한은의 독립성’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건 이때가 처음이다. [중앙포토]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중립성 보장을 위해 한국은행 총재가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을 맡도록 해야 한다.”

 1988년 11월 14일 김건 당시 한은 총재의 기자회견은 파격이었다. 한은 독립을 공개적으로 주장한 총재는 그가 처음이었다. 당시만 해도 재무부 장관이 금통위 의장을 겸하면서 통화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임기 중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2년 3월 김 전 총재는 퇴임 인터뷰에서 “한은의 중립성이 보장돼야 한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의 꿈은 97년 찾아온 외환위기 와중에 국제통화기금(IMF)의 압력으로 실현됐다. 그러나 김 전 총재의 구상과 달리 은행감독원이 정부가 관할하는 금융감독원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런 내용으로 한은법이 개정되자 김 전 총재는 항의의 뜻으로 전·현직 총재 공식 모임인 ‘한총회’에 참석하지 않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강직했다.

 한은 독립의 기틀을 마련한 김 전 총재가 숙환으로 17일 별세했다. 86세. 고(故) 김 전 총재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의 막내(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다닌 그는 6·25 전란이 한창이던 51년 9월 한은에 입행했다. 조사제1부장, 자금부장, 은행감독원장 등 한은 요직을 두루 거쳤다. 조사부장(현 조사국장)을 지내기 전 젊은 시절부터 ‘KK’란 약칭으로 불릴 만큼 한은 안팎에서 존재감이 뚜렷했다.

 그는 한국수출입은행 전무, 한국증권거래소 이사장을 거쳐 88년 3월 한은 총재로 임명됐다. 그러나 한은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김 전 총재 이전에 임기 4년을 다 채운 총재는 16명 중 3명에 불과했다. 통화정책 권한은 정부에 예속돼 있었고 금리·금융 자율화도 요원했다. 그가 한은 독립을 일생의 숙원으로 밀어붙였던 건 이 때문이기도 했다. 한은 출신 김학렬 연세대 특임교수는 “한은 독립성이 요원한 숙제였던 시절 중앙은행의 비전을 앞서 제시하고 끈기 있게 주장해나간 ‘강직한 한은맨’의 표상”이라며 “업무에선 매우 엄격한 스타일이었지만 젊은 후배에겐 한없이 따뜻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총재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엔 19일 이주열 한은 총재를 비롯해 박승·김명호 전 한은 총재 등이 방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유족은 배우자 이광일씨와 재민(동의대 교수)·성민(KAIST 경영대 교수)·황민(연세대 원주의대 교수)씨 등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 발인은 21일 오전 7시, 장지는 천안공원. 02-3410-3151.

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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