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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 비상구의 정상화, 글보다 픽토그램이 효과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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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3호 15면

아파트 비상구에 정수기, 자전거, 농구공 등 잡동사니가 놓여 있다. 쌓여 있는 물건이 비상계단 절반을 막고 있다. [사진 이영탁]
비상구 앞에 부착한 바닥스티커와 ‘적재금지’를 나타내는 픽토그램. 바닥스티커에는 ‘비워두세요. 비상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라는 문구를 썼다. 비상계단에는 보행자를 형상화한 스티커를 붙여 ‘걷는 곳’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선영 사진작가]

지난해 5월 발생한 전남 노인요양병원 화재사건을 기억하십니까. 불이 난 지 8분 만에 진화에 성공했지만 이미 21명의 목숨을 앗아간 후였습니다. 비상구가 잠겨 있던 탓에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유독가스가 가득 찬 건물에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었습니다. 넉 달 전 이케아 광명점에서 화재 경보기 오작동이 발생해 수천 명이 대피 소동을 벌였던 해프닝도 기억나실 겁니다. 비상구 곳곳에 물건들이 쌓여 있어 실제로 불이 났다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작은 외침 LOUD] ⑮ 비상구 안전 지키는 스티커

정부는 벌써 10년 넘게 비상구의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화재사고 피해를 줄이기 위해 건물 내 비상계단 입구를 잠그거나 막아두지 않도록 홍보하는 겁니다. 비상구를 막거나 주변에 물건을 쌓아두는 것은 법으로도 금지된 일입니다. 소방법에 따라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되고 신고한 주민에게는 건당 5만원의 포상금도 지급됩니다. 그런데도 대형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비상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전남 노인요양병원 사례처럼 아예 비상구에 자물쇠를 채워 놓는가 하면 가전제품이나 서랍장으로 출입문을 가려놓은 곳도 있습니다. 평소에는 자주 쓰지 않는 공간이다 보니 이런저런 물건을 쌓아두고 창고로 쓰는 경우도 많죠. 박재성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긴급 상황 발생 시 비상구로 사람들이 몰려들면 쌓여 있는 물건들이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며 “우리나라의 경우 비상구에 대한 안전의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미흡한 점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직접 둘러본 비상구의 모습도 여전히 변한 게 없었습니다. 아직도 일부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는 판매용 제품이 들어 있는 커다란 상자를 비상계단 곳곳에 쌓아둡니다. 아파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전거·유모차·화분·폐휴지까지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입니다. 세 살, 여섯 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차지현(40·서울 금천구)씨는 “현관 근처 계단에 아이들 물건을 둔다”며 “다른 이웃 주민들도 그렇게 공간을 활용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정민(33·서울 서대문구)씨는 “비상구에 물건을 두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출입을 막을 정도로 많이 쌓아두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아니 잖느냐”고 말했습니다.

열다섯 번째 LOUD는 아파트 비상구 옆에서 주장합니다. 화재 등 혹시 모를 사고가 생겼을 때 비상구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겁니다. 광운대 공공소통연구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작은 아이디어를 제시했습니다. 바로 비상구 안팎에 붙이는 픽토그램 스티커입니다. 강제성을 강조하는 안내문 대신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을 활용해 비상구 안전 문제를 자세하고 명확하게 알리자는 취지입니다. ‘주차금지’ ‘보행금지’ 등을 알리는 교통표지판 기호에서 착안해 화분·자전거·우산·유모차·의자 등 가정에서 흔히 비상구에 내놓는 물건들을 원 안에 간단한 그림으로 표시하고 대각선을 그어 ‘적재금지’를 뜻하는 기호를 만들어봤습니다. 비상구 출입문 앞에 붙일 바닥스티커도 제작했습니다. 초록색 바탕에 하얀 비상구가 그려진 형태로 ‘비워두세요. 비상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라는 문구를 함께 넣었습니다.

실제 효과가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LOUD팀은 서울 금천구청의 도움을 받아 9일 관악우방타운아파트 102동에 제작물을 시범 부착했습니다. ‘적재금지’를 안내하는 픽토그램과 바닥스티커를 비상구 주변에 부착하고 비상계단에는 보행자를 형상화한 그림을 붙여 ‘물건 두는 곳’이 아닌 ‘걷는 곳’의 의미를 부각시켰습니다. 비상구 표시등 옆에는 ‘비상구 안쪽을 비워두세요’라는 표지판도 부착했습니다.

LOUD팀의 작업을 지켜본 주민 박두리(78)씨는 “비상구가 환해지고 멋있어졌다”며 “전에는 빈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어 물건을 놓게 됐는데 그림을 붙여 놓으니 함부로 뭘 쌓아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천서영(36)씨도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라는 생각에 물건을 두게 됐는데 그림을 붙여두니 안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이곳에서 5년째 경비원으로 일하는 배석모(70)씨는 “관리사무소 차원에서 비상구 내 적재 금지를 안내하고 있지만 주민들의 편의를 고려하다 보니 강제하기 힘들었다”며 “기분 상하지 않게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평가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인재(人災)라고밖에 볼 수 없는 대형 참사를 잇따라 겪으며 안전 불감증에 대해 자책하고 개선책을 반복해 마련했습니다. 사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예방법은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사소한 원칙입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서는 작은 실천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깨끗이 비워둔 비상구가 나와 우리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물건이 놓여 출입이 힘들어진 비상구의 현황을 볼 수 있습니다. [동영상 장종원]

김경미 기자 gae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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