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라인blog] 배구의 리베로, 자유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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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리베로'는 자유인이라는 뜻입니다. 1974년 독일 월드컵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독일 축구팀의 프란츠 베켄바워가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뛰면서 리베로라는 직책이 생겼습니다.

배구에서는 96년에 생겼습니다. 한 세트에 몇 번이고 교체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리베로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스파이크 서브가 발달하면서 배구의 흥미가 줄어들기 시작할 때입니다. 수비 전문 선수를 키워 랠리를 길게 해 배구의 재미를 더해보자는 취지로 리베로가 태어났습니다.

리베로는 그러나 이름과 달리 제약이 많습니다. 서브나 블로킹은 물론 스파이크도 할 수 없습니다. 주장도 못합니다. 리베로가 네트(성인 남자 2m43cm, 여자 2m24cm)보다 더 높이 있는 볼을 터치해서 넘기면 반칙입니다.

리베로는 상대 서브를 책임집니다. 60% 이상 리베로가 처리해야 합니다. 요즘 배구 서브는 말이 서브지 실은 거의 스파이크입니다. 시속 110㎞가 넘는 스파이크 서브를 넣는 선수가 비일비재합니다. 사실 리베로의 역할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강스파이크를 받아내야 하는 순간반응 능력은 다른 어떤 스포츠의 포지션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축구나 아이스하키의 골키퍼가 리베로와 비슷하지만 '막아내는 것'과 '살려내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상대의 공격을 잘 받으면 당연하고, 놓치면 수비 전담 선수가 그것도 못 받느냐는 핀잔이 나옵니다. 다른 선수와 리베로 사이로 떨어진 공도 놓치면 리베로의 실수로 기록됩니다.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은 "리베로는 고되다. 잘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고 못하는 것만 드러난다. 그러나 수비의 핵심선수다. 수비가 안 되면 공격도 안 되고 결론적으로 배구가 안 된다. 리베로 도입 이후 수비가 강화되면서 아기자기한 공격, 다양한 공격이 가능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배구에서 리베로는 아직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현대캐피탈의 주전 리베로인 오정록은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하자 놀라면서 "최근 3년 동안 인터뷰는 이번이 두 번째며, 만약 내 이름이 기사에 나온다면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삼성화재의 리베로 여오현은 미디어 가이드북에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앙케트에 '키가 크면 배구를 하고, 아니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다른 공격수처럼 스파이크를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공격수였던 여오현은 그래도 감사해 합니다. "중학교 2학년 이후 키가 크지 않았는데 리베로 제도가 생겨 좋아하는 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성호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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