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씨 12번째 시집 '미스 사이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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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잔잔하고 애달픈 '엘레지' 한 곡조 들은 기분이다. 한 권의 시집에 담은 62편 모두가 베트남을 소재로 했으니 '베트남 엘레지'랄 수 있겠다. '라이따이한의 엘레지'라 부르면 과거사를 보듬으려는 안간힘이 읽히고 '아오자이 엘레지'라면 하얀 아오자이 걸친 베트남 처녀의 깔깔대는 풍경이 떠오른다.

중진 시인 이동순(54.사진)씨의 12번째 시집 '미스 사이공'(랜덤하우스중앙)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엘레지 가락을 닮았다. 목소리는 가녀리고, 분위기는 애잔하다. 오늘날 베트남을 주제로 시를 읊으려면 이렇듯 슬픔의 정조가 배야 하나 보다.

'김씨라는 성만 기억합니다/그때 태어난 그분 아들은 이제 청년입니다/서러운 라이따이한으로/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온 지난 수십 년/흥건한 눈물의 세월이었지만/언제나 저를/미스 사이공이라고 불러주던/그분을 기다립니다'('미스 사이공'부분)

'영영 일어서지 못하고/병상에 누운 채로 눈만 뒤룩거리는 아이/…/고엽제 맞았던 어미가/만신창이 몸으로 출산한 기형 아기/…/나를 자꾸만 엄마라 부르며/품에 안아달라는 아이'('고엽제 2'부분)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인 시인은 2003년 초 베트남 호치민 시 투득 지구의 기술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다. 거기서 그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라이따이한을, 가만히 있어도 팔과 다리가 꼬이는 고엽제 환자 아이를, 한국을 '약속의 땅'으로 여기는 청년을, 한국 연예인에 열광하는 소녀를, 한국인 사업가에게 사기당한 무역상을 만났다.

그 인연 하나하나가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 편의 시마다 하나의 사연이 읽힌다. 베트남에 대한 인상을 묻자 시인은 괴로워했다. "우리는 아직도 엄청난 빚을 지고 있습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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