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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6년(45)|징용 노무자의 저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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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던 40년대 국내의 항일운동은 그 명맥이 끊어져있었다. 국내 지도층은 대세에 밀려 소극적 친일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런 최악의 상태에서 민중의 항일은 지속되었다. 징용으로 끌려간 노무자들의 항일도 그 하나다.
태평양전쟁 초기의 일본의 승전은 1년이 못돼 역전되어 43년에는 이미 파탄이 내다보였다. 남태평양 전선의 일본군은 수세에 몰리고 국내에선 항공기·함정등 군자물자 증산이 필사의 과제가 되었다. 그랬지만 물적·인적 자원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본 청년의 군사동원에 따른 노동력 부족을 메우는 대안으로 짜낸것이 강제징용·학생근로동원·여자정신대의 결성이다.
43년 일본내 한국인 숫자는 1백88만명-그중 43년 한햇동안 징용된 노동자수는 12만5천명이다. 이 시기 일본의 군사생산체제에서 한국인 노무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예를들어 탄광의 경우 43년의 일본내 탄광노무자 총수 39만여명중 3분의1인 12만4천명이 한국인 광부였다.
징용된 노무자의 대우는 최악이었고 그로인해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일본관헌은 노무자의 소요사건 배후에있는 민족운동그룹을 찾아내는데 혈안이었따. 『조선인 노무자의 긴급충족에 따라 징용대상이 확대되면서 노무자중에는 중학교졸업이상의 소위 지식층계급이 늘고 있다.

<일광부의 3분의1>
강산현와 조선소등 3개 사업장의 예를 보면 3천2백53명의 조선인 노무자중 4백67명이 중등교육을 받은자다. 이들 소위 지식층중에는 민족의식이 농후한 자들이 많아 무지한 노무자를 선동, 소요에 가담시키고 있다. (43년 11월 특고경찰 보고서)』
한국인 탄압의 전위였던 특고경찰은 친일단체 협화회를 앞세워 조선인 노무자의 통제감시역을 맡게했다. 일본내 한국인은 한사람도 빠짐없이 협화회에 등록토록했다. 그랬지만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강제노동에 견디지못한 노무자의 탈주가 일상화했다.
44년4월 한달동안 특고경찰은 조선인 노무자에 대한 일제 취체를 단행해 작업장에서 도주한 1천88명의 노무자를 적발해냈다. (특고문서)
징용된 노무자들의 저항은 최근 공개된 일본의 특고극비문서속에 담겨있다. 그 사례들.
◇43년3월부터·5월25일 사이에 연속적으로 일어난 주하현 당진탄광·소성탄광의 폭행·반항사건읕 내사한 결과 조선인 노무대 대장 풍전실(36)이 중심이된 의식분자그룹을 발견, 취조한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백받았다. 주동자 풍전실은 향리인 경북영천에서 청년연맹등 조선독립운동단체게 가담, 활동하다 여러차례 검거된 경력이있다. 그는 42년11월 노무자대장으로 소성탄광에 왔다.
그는 탄광에 온후 급식·노무관리의 차별대우에 따른, 조선인의 불만을 이용, 민족의식을 선전·계몽해 다수의 동지를 획득하고 전쟁으로 일본국력이 쇠퇴한 이시기에 일본내 조선인이 일제히 봉기해야한다고 선동했다.
그는 42년11월 소성탄광에서 동료노무대장 상산찬직, 작업반장 송전정섭·죽산영국등을 포섭, 파업을 조종했다.
43년1월에는 이웃당진탄광에도 손을 뻗쳐 하시굉·우목상기·산단난영등을 포섭, 저항운동을 주도하도록 했다.
그는 노무상의 차별은 개개인의 불평불만으로는 해결 안되니 노무자의 결속도니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조선독립을 실현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단결해 일본인과 맞서 싸우자고 선동했다.
특고는 이들 조직을 일망타진, 44년1월26일 관계자 일당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사국에 송청했다.
◇오오사까 조선인직공의 민족운동그룹 검거-경남 합천출신의 김상내(20)는만추에 이주해 저항운동단체에 가담했던 자로 42년11월 일본에 들어와 대판계전철공소 선반견습공으로 취직, 항일조직에 착수했다. 43년2월 김상내는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 동료 직공인 하덕치(17) 임춘웅(22) 김공준(33)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 조직을 편성, 4월부터 파업과 선동을 계속했다.
이들 일당은 일본은 강대국인 미·영과의 장기전능력이 없어 패전한다. 이기회에 조선민중이 봉기해야한다고 선전했다. 그들은 당면 행동지침으로 ①당국의 방공연습에 미루어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이 임박했다. 조선인은 공습때 훈련받은대로 활동해 사상자가 생겨서는 안되니 모두 위험에서 피하도록 계몽할 것. ②조선인 청년은 일본의 패전에 대비해 인도의 독립국민군과 마찬가지로 무장조직을 갖추자. ③재일동포의 비참한 상태에 유의, 서로 도우면서 독립의식을 고취해야한다.

<협화회서 통제감시>
특고경찰은 43년7월 이들을 검거, 무려 5개월의 심문을 거쳐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
노무자 저항사례는 끝이 없다.
또하나 기억해야할 일은 지도층들이 일본의 전쟁질주에 정신없이 따라가고 있던 시기,이들 징용 노무자들은 일본 대본영발표의 허위를 들여다 보면서 일본의 전쟁능력은 45년이 한계임을 내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사실은 일본의 특고경찰이 적발해 단속한 유언비어속에서 볼 수 있다. 그 사례 몇가지.
◇경북경주출신 용접공인 문진수는 43년3월12일 취업장인 오오사까의 석탄금속공업사 천만공장에서 조선인 공원들에게 지난해 미드웨이해전에 관한 대본영발표는 거짓이다, 한 참전수병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은 예기치 못했던 적기의 내습으로 단1대의 항공기도 모함에서 이륙못한채 항공모함 4척이 침몰했다, 그 수병이 탔던 전함 이세구만은 간신히 도주할수있었다고 한다, 조선은 일본보다 배급미가적어 울산방면에선 최근 20∼30명이 굶어죽었다, 일본 패전의날은 멀지않았다, 일본의 패전은 조선의 독립이다, 우리는 일본에 협력지 말자라는 허위선동을 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에 관한 임시취체법 위반으로 11월 검차라에 송치함.
◇나가사끼의 해군공사장에 징용돼온 전남장성출신의 한 노무자는 44년초 그의 동료들에게 작년부터 전세가 기울었으며 물자·군인 모두가 달리고 있다, 우리공사장도 해군막사 13동을 짓기로했다가 2동이 취소된것은 물자난 때문이다, 일본은 45년까지가 버틸수 있는 한계라는 유언비어를 했다해서 체포당했다.
그무렵 재일한국인의 광범한 저항은 국민학교에까지 독립운동단체가 생겨난데서 볼 수 있다. 최근 특고문서에서 밝혀진 사건내용.
◇조선독립연맹사건-오오사까서정천구소재 천배국민학교 고등과2년 의원태순(17)외 수명이 동교출신 오오사까시립 중학2년 신정수석(17)의 지도아래 아동20여명을 규합, 43년4월 조선독립연맹을 결성했다.
주모자 수석은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 영향받아 조선독립에 헌신키로 결심.모교인 천배국민학교의 조선인아동은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것등 차별대우에 따른 불만에 착안, 포섭활동을펴 문회진·김낙중·이일태·추산룡업(이상 모두16세)등을 중심으로 동교5년생이상 20여명을 규합했다.

<항일전사훈련 실시>
이들은 5월30일 의원태순(위원장), 외무부장 추산룡업, 내무 이일태, 후생 송산국한, 문부 정상낙기, 회계 임금일로해 독림연맹을 발족했다. 이들의 조직은 헌법제도를 설치, 비밀유지와 내부통제를 하게했으며 연맹원은 활동실적에 따라 군대계급을 주었다.
이들은 연맹원의 교육을 위해 오오사까에서 운수업을 하는 김봉철(36)의 원조로 중도정의 조선인주택지에 바라크 한채를 빌어 야학숙을 개설, 표면상 학과예습을 내세우고 민족교육·무전실습등 그들 나름의 항일전사 훈련을 했다.
그들은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은패한다 ②이 기회에 미·영·중경정부의 원조를 얻게되면 쉽게 조선독립이 된다 ③조선인생도는 한마음으로 뭉쳐 독립운동을 준비해야 한다는것을 기본지침으로 했다. 이들은 야학숙읕 개설한 3개월후인 8월 당국의 감시를 눈치채고 동교5년생 이상중 일본인학생 몇명도 포함된 50명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을 내건 「신흥소년단」을 조직, 그들의 조선독립연맹을 숨기려했다.
특고경찰은 44년1월21일 이들 소년항일조직을 포착, 일제검거를 단행하고 3월9일 모두를 치안유지법 위반죄를 적용, 오오사까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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