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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死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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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1849년 12월 22일 오전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의 세묘노프 광장. 28세의 젊은이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곳에 마련된 처형대 앞으로 끌려나왔다. 죄수 20명과 함께였다. 사회주의자 페트라세프스키의 서클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목은 반역죄.

그날 광장엔 눈보라가 몰아쳤다. 기온은 영하 22도. 처형대엔 먼저 페트라세프스키 등 세 명이 섰다. 손은 묶이고 눈은 가려졌다. 사제는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했다. 이어 "사격 준비" 구령이 떨어졌다. 다음 차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옆의 동지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페트라세프스키 등을 응시했다. 그 순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전령이 나타나 "폐하가 자비를 베풀어 중노역형으로 감형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후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4년을 보낸 도스토예프스키는 광장의 기억을 장편소설 '백치(白痴)'에 적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숨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그중 2분은 동지들과 작별하는 데, 2분은 삶을 돌아보는 데, 나머지 1분은 이 세상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는 데 쓰고 싶다." 그런 그는 "사형은 영혼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소설 '사형수 최후의 날'에서 "사형은 죄인의 머리만 절단하는 게 아니고, 가족의 머리까지 절단한다"고 썼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마약을 운반하다 체포된 베트남계 호주 청년이 처형당했다. 호주 당국과 인권단체가 사형만은 막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같은 날 미국에선 1976년 사형제 부활 이후 1000번째 사형이 집행됐다. 한국엔 사형수가 있지만 98년 이후 처형당한 이는 없다.

사형을 둘러싼 논란의 역사는 길고 길다. 세조는 "임금이 유충(幼沖.나이 어림)할 때 항상 이윤(伊尹.은나라의 명재상), 주공(周公.주나라의 현자)이 있으랴. 사형을 대전(大典)에서 뽑아버리는 게 어떠냐"라고 했다(문일평, 史外異聞). 하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루소는 "우리가 살인자에게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살인할 경우 사형대에 오르는 데 동의해야 한다"며 사형제를 옹호했다. 칸트.헤겔도 그편이었다. 21세기엔 사형제를 어떻게 봐야 할까. 올 초 관심을 좀 보이던 국회는 왜 이렇게 조용한 걸까. 오래 전 법사위에 상정된 사형제 폐지법안엔 먼지만 쌓이고 있다.

이상일 국제뉴스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