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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수도 복구 안 돼 … 상가 80% 폐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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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부서진 상태로 방치된 뉴올리언스 시내의 한 가옥(사진위). '위험하니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시내에는 아직도 이런 집들이 많다. 아래는 시내 중심지인 캐널가(街)의 썰렁한 모습. [뉴올리언스 AP=연합뉴스]

5일 오후 7시. 어둠에 싸인 미국 뉴올리언스의 동쪽 다운맨가(街).

TLC 세차장의 희미한 불빛 아래 헨리 화이트(48) 흑인 부부는 트럭 뒤에 실린 가재도구를 묶고 있었다. 암흑 천지에서 그나마 불빛이 있는 게 이곳인 까닭이다. 다운맨가 근처에서 한 달가량 살다가 텍사스 휴스턴의 친척 집으로 간다는 화이트는 "전등 하나 없는 집에선 짐을 꾸릴 수 없었다"고 했다. 피해가 가장 심했던 이곳은 어둠 그 자체였다.

화이트는 이 지역을 '유령의 도시(Ghost City)'라고 불렀다. 그는 어둠 속 주택가를 가리키며 "저 폐가(廢家)들 속엔 아직도 노인들의 시신이 뒹굴고 있다"며 몸서리쳤다. 그러면서 "암흑과 모기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어 떠난다"고 했다.

카트리나 상륙 이후 100일(7일)을 맞아 다시 찾은 뉴올리언스. 지역 치안도 불안해 보인다. 오후 8시부터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다. 어둠 속에서 경광등을 번쩍이는 순찰차들만 눈에 띄었다.

이곳 이스트 뉴올리언스 지역은 카트리나가 몰아쳐 1층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던 곳. 거의 모든 주민이 흑인이고, 뉴올리언스에서 최악의 빈민촌으로 꼽혔다. 타고 대피할 차도, 갈 곳도 없던 처지였기에 희생자도 가장 많았다. 한때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지 100일이 다 됐지만 전기.가스.수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들어오는 게 없다.

시내 중심지라는 캐널가. 80% 이상의 상점이 닫혀 있다. '주얼리랜드'라는 보석가게는 입구에 진열장 유리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약탈당했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인적이 끊긴 거리엔 시커먼 쥐가 돌아다닌다. 쓰레기더미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 신호등은 고장 난 채 방치돼 있다.

놀라운 건 외부엔 복구가 순조로운 것처럼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10월 말 핼러윈 당시엔 시내 중심부에서 화려한 퍼레이드가 펼쳐졌고 그 장면이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퍼졌다.

그러나 이는 관광객를 불러모으기 위한 이벤트였을 뿐이었다. 뉴올리언스는 여전히 카트리나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도시 전체의 30%에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경기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프렌치 쿼터에서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는 모하메드 마루프는 "카트리나 전에 비해 매상이 4분의 1로 줄었다"고 한탄했다. 이재민은 더 괴롭다. 자동차 세일즈맨이었던 브라이언 애킨슨 부부는 좁은 호텔 방에서 두 아이와 함께 두 달째 살고 있다. 그동안 호텔에서 묵고 있는 15만 명의 숙박비를 연방재난관리청(FEMA)에서 내줬지만 다음달 7일부터는 그나마 끊긴다. 그는 "추운 겨울을 어디서 지내야 할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카트리나는 단순한 천재지변이 아니다. 흑백 갈등, 무능한 행정 등 미국 사회의 치부가 드러난 사건이다. 뉴올리언스 운하의 양쪽 제방 중 붕괴됐던 건 공교롭게도 흑인 밀집지역 쪽의 둑이었다. 이 때문에 희생자의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게다가 복구 작업이 지체되면서 흑인을 중심으로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더딘 복구 작업의 원인이 흑인이 주류인 뉴올리언스를 빼앗으려는 공화당 측 음모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FEMA는 뉴올리언스 현지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기념품 가게엔 'FEMA(Federal Employee Missing Again; 또다시 실종된 연방직원)'라고 쓴 티셔츠가 팔리고 있다. 2일엔 침수 지역으로 들어갔던 FEMA 직원 20여 명이 주민들의 위협을 견디다 못해 철수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뉴올리언스의 복구 지연은 국가적 수치"라고 개탄했다.

뉴올리언스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주민, 특히 흑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콕스 뉴스에 따르면 전체 주민의 80%가 돌아오지 않았다. 뉴올리언스 인구는 과거 46만 명이었으나 현재는 10만 명이 고작이다. 수퍼마켓을 경비하던 그렌타 경찰 소속 웨인 크론 경사는 "옛날의 뉴올리언스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23년간 경찰관으로 일했다는 그는 "같은 맥도널드에서 일하더라도 휴스턴.마이애미에서 일하다가 이곳으로 돌아오면 절반의 임금밖에 못 받는다. 누가 돌아오겠느냐"고 반문했다. 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스는 어둠 속에서 질식해 가고 있었다.

뉴올리언스=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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