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람] "루푸스 환자 1만 명과 희망 주고받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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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의학계에서는 루푸스를 '천의 얼굴을 가진 질병'이라고 부른다.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근본적인 치료법조차 없다. 민덕님(57.여.서울 삼전동)씨는 20년 동안 이 병에 시달려왔다.

"처음 10년은 병명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고열로 온 몸이 달아오르고 두통에 시달렸지요. 신체가 무력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어려웠고요."

1996년까지 그는 주기적으로 엄습하는 이 병의 증세에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했다. 크고 작은 병원을 다니며 안 받아본 치료가 없었다.

대형병원 두세 곳을 거친 뒤에야 자신의 병이 루푸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병명을 알게 됐다는 것 외에 달라진 건 없었다. 2003년 녹내장 수술로 시력이 크게 떨어졌고 폐기종까지 앓고 있다.

그는 약값과 병원비로 강남집 한 채 값 이상을 썼다고 한다. 건설업을 하는 남편과 장성한 두 아들이 뒷바라지를 해준 덕에 버틸 수 있었다는 그는 2년 전부터 서울 삼전동에서 꽃집을 하고 있다. 자신이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일을 통해 활력을 찾고 싶어서라고 했다.

"2000년 얼굴근육 마비가 왔을 때 풍선부는 치료를 한 적이 있었어요. 둘째 아이는 엄마 풍선 부는 것을 도와주다가 풍선 디자이너가 됐어요. 그래서 저도 풍선과 어울리는 화훼사업을 하게 됐어요."

97년 이 병을 앓고 있는 아나운서 정미홍씨가'루푸스를 이기는 사람들 협회'를 조직하자, 민씨는 이 단체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루푸스 환자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병명조차 모르는 사람, 알고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는 사람, 장기 투병으로 인한 경제적 문제와 좌절감.소외감으로 고통받는 사람 등등….

환자의 입장에서 다른 환자들의 어려움을 상담하는게 그가 맡은 일이다. 매주 한번씩 서울 운니동에 있는 사무실에 나가 10여 명의 환자들을 만난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생업을 접고 달려가고, 밤낮없이 전화 문의에 응한다고 했다. 7년여간 그가 돌본 환자는 1만 명에 달한다.

"병원 울타리 밖에서 환자들끼리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게 큰 힘이 되거든요."

현재 이 협회엔 3000여명의 환자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루푸스 퇴치를 위한 홍보.교육 사업과 함께 영세민 환자 지원도 한다. 6일엔 서울 한남동 하얏트 호텔에서 테너 김동규씨와 소프라노 김원정씨를 초청해 후원의 밤 행사도 연다.

그는 "국내에 루푸스로 진단을 받은 환자는 2만명 정도지만 실제론 10만명 이상 될 것"이라며"이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왕희수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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