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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이계진 대변인의 소변(笑辯)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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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 대변인은 데뷔 첫날부터 주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마침 추병직 건설교통부 장관이 오포 비리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에게서 5000만원을 빌렸다는 사안이 불거졌다. 종전 같으면 즉각 뇌물 의혹 사건으로 규정하고 "물러나라"는 성토가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대변인은 "이해할 수 있는 문제"라며 흘려 넘겼다. 모처럼의 호재를 만나고도 대정부 공격을 포기했으니 내부 비판이 없을 수 없다. 박근혜 대표까지 주위에 "대변인이 잘하는 건가요"라고 고개를 갸웃했다고 한다.

이 대변인의 '부드러운' 화법은 그 뒤로도 이어지고 있다. 정부.여당 쪽에서 한나라당을 매섭게 공격해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식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한답시고 "너무 자상하시다" "참 한가하시구나" 등 직격탄보다는 우회 어법을 구사한다. 물론 내용 속엔 뼈아픈 지적도 담겨 있지만 사용하는 언어는 둥글고 순하다. 순한 만큼 '독설'에 길든 사람들에겐 맛이 밍밍할 수밖에 없다. 그 밍밍함을 한나라당 사람들이 언제까지 참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네 정치판의 천박성을 돌아보면 그의 시도가 돋보이고 의미도 있다. 잘 숙성시켜 간다면 한나라당은 물론 우리 정치에 보약이 되리라고 믿는다.

우리 정치에서 품격이 실종된 지는 오래다. 과거 같은 촌철살인의 해학이나 고급스러운 유머는 찾아볼 수 없고, 유치한 말장난에다 욕설 수준의 비방이 판친다. 그 최전선에 각 당의 대변인실이 자리 잡고 있다. 대규모 부대변인 군단까지 거느리고 마구 '욕설'을 배설한다.

아나운서 출신으로 '말하기'가 직업이었던 이 대변인으로선 정치판, 특히 대변인실의 언어순화가 절실하다고 생각했음 직하다. 이 대변인은 "국민이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문화에 식상해 있다"면서 "대립각을 세우겠지만 용어에 혐오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라고 자신의 소변인론을 폈다. 그의 실험이 성공하길 성원한다.

정치언어의 수준 저하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의 프리스턴 리뷰라는 잡지가 역대 대통령선거의 토론을 분석해 각 대통령들의 수준을 평가했다. 교육 수준을 나타내 주는 표준어휘검사 방식을 동원, 대선토론 녹취록을 일일이 분석했다. 분석 결과 2000년 대선토론에서 부시는 6학년, 고어는 7학년 수준이었다. 1992년 토론에선 클린턴 7학년, 부시와 페로는 6학년 수준으로 나타났다. 케네디와 닉슨이 10학년, 링컨 11학년, 더글러스 12학년과 비교하면 세월이 흐를수록 연설 수준이 낮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헝가리 출신의 영국 사회학자 프랭크 퓨레디는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청어람미디어 간)에서 정치인들이 대중을 바보 취급함으로써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 정치인들의 발언도 수준평가를 의뢰해 보고 싶다. '특유의 달변'이라고 평가되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도 품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취임 초 검사들과의 대화에서 "막가자는 거지요"라며 언성을 높일 때부터 최근의 댓글 정치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의 품위에는 어울리지 않는 언행이 숱하게 나왔다. 이해찬 총리도 툭하면 육두문자에 가까운 독설을 뿜어댄다. 과연 몇 학년 수준이라고 분석될까. 일부 험구 의원의 막말은 '유치원 수준'이란 판정이 나오지는 않을까 겁난다.

정치언어의 수준 저하가 세계적 현상이라지만 우리의 저급 수준은 그 도가 너무 지나치다. 이젠 좀 달라져야 한다. 말에 향기가 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악취를 풍겨서야 되겠는가. 모처럼 선보이고 있는 '웃음 말' 실험이 청량제가 돼 정치언어의 격조를 높이고 정치문화를 한 단계 품격 있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허남진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