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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제대로 읽는 재팬] 위안부 협상 '골대론'으로 미국 설득한 아베, 다음 행보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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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상원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하원요? 거의 어려움이 없었어요. 노 프라블럼(No problem), 아베 연설 때 모두 기립박수하기로 돼 있습니다.”

 지난달 말 미국 워싱턴에서 존 메케인 상원의원(공화)이 일본의 한 핵심인사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다. 오는 29일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 총리의 미 양원 연설이 화제에 오르자 한 말이다. 역사 문제로 주제를 옮기자 메케인은 “그것보다 오키나와 이야기(주일미군 기지 이전문제)나 해봅시다”라고 응수했다 한다. 이 일본 인사는 “메케인이 상원 군사위원장이라 그런 점도 있지만 솔직히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한 우려를 보이지 않아) 놀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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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메케인의 발언을 ‘아베 지지자’의 ‘소수 의견’으로 간주하는 게 맞을까.

 같은 시기 미 워싱턴의 한 집무실.

 일본의 한 유력인사가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슬쩍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불만을 털어놨다. 그러자 동아시아 책임자인 러셀 차관보는 이렇게 속삭였다 한다. “(한국의) ‘무빙 골포스트(moving goal posts·골대가 움직인다)’가 문제란 걸 잘 알죠. 실은 그 부분은 우리도 걱정하고 있어요. 우리도 (한국에) ‘골대를 움직이지 말라(Don’t move the goal posts)’란 이야기를 하려 하는데요….”

 ‘골대론’은 일본이 만들어 낸 논리다. “한국이 (위안부 문제 등에서) 요구하는 최종합의점이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고 국내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인사는 이 ‘골대론’이 미국에서 제대로 먹혀들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에게 러셀 차관보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한국에 그런 뜻을 전하려 하지만 마크 리퍼트 주한 미 대사 습격사건 건도 있고…, (한국 내 여론이 예민해) 좀 조심스럽게 하려 합니다.”

 일본의 핵심 소식통이 전한 이야기다. 일본의 ‘하소연’을 달래는 미국의 ‘립서비스’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불만을 충분히 이해하니 일단 일본이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고도의 ‘작전 멘트’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베 방미’를 계기로 미·일이 이처럼 바싹 밀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아베는 최근 마지막 방미 순방지로 로스앤젤레스(LA)를 추가 확정했다고 총리 관저 관계자가 전했다. 최근까지 일 정부 일각에선 “샌프란시스코의 스탠퍼드대에서 강연하는데 굳이 또 LA(USC대 방문 및 일본 교민 간담)를 갈 필요가 있냐”는 의견이 대두됐다고 한다. 실은 한국계 교민이 많은 LA에서 혹시라도 ‘반 일본 시위’라도 벌어지면 난처한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베는 “개의치 않는다”며 밀어붙였다 한다. 또 ‘양원 연설’의 연설문 작성자인 다니구치 도모히코(谷口智彦)를 지난달 장기간 미국에 머물게 하며 연설문 초안을 미국 측과 공동으로 손질하도록 했다는 후문이다. 미·일 간 손발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양상이다.

 또 하나 아베의 의미심장한 자신감은 지난달 27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위안부를 지칭해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의 희생자”라 한 것이다. 아베의 입에서 이 단어가 나온 건 1·2차 집권기를 통틀어 처음이다. ‘trafficking’이란 단어는 미국 등 국제사회에선 강제연행을 포함하는 용어다. 미 국무부 공식견해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일본어로 ‘인신매매’라 하면 그렇지 않다. ‘민간업자’에 의한 자연스런 성매매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아베로선 미국과 국내 보수지지층 양쪽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절묘한 표현을 찾아낸 셈이다.

 하지만 복수의 고위 외교소식통은 “실은 아베의 이 발언 뒤에는 복선이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복수의 소식통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현재 한국이 위안부 해결책으로 일본에 요구하고 있는 건 ‘사사에 안+α’. ‘사사에 안’이란 2012년 일 민주당 정권 당시 외무성 사무차관이던 사사에 겐이치로(현 주미대사)가 한국에 전달한 세 가지 해결책. ▶일 총리의 사죄 서한 작성 ▶주한 일본대사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찾아가 총리서한 전달 ▶‘일본 정부’ 예산으로 인도적 자금 지원이 그것이다. 여기에 한국 측은 추가로 ▶(국가의) 법적책임 인정 ▶국가예산에 의한 제2의 아시아여성기금 조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과적으로 ‘3종 세트’가 ‘5종 세트’가 된 셈이다.

 반면 일 정부는 역으로 ‘사사에 안-α’를 주장한다. 쉽게 말하면 ‘1.5종 세트’ 정도밖에 내놓지 못하겠다는 것. 문제는 ‘3대 전제조건’을 한국이 사전에 들어줘야 그나마 협상에 응할 수 있다고 버틴다는 점이다. 첫째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이전, 둘째는 미국 내 한인단체의 위안부 관련 활동 중단, 셋째는 ‘성 노예(sex slave)’란 표현의 사용중단이다.

 가장 예민한 대목은 바로 ‘성 노예’. 한국으로선 2012년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강제적 성 노예’란 말을 썼듯 국제적으로 이미 널리 통용돼 있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일본은 쉬쉬하지만 실은 ‘성 노예’란 단어를 처음 쓴 것은 일본인이다. 1992년 2월 도쓰카 에쓰로(73) 인권변호사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 단어를 썼다. 일본(국민)이 만들어 확산시킨 단어를 한국보고 쓰지 말라하는 황당한 경우다.

 하지만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파 핵심들은 이 조건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여긴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아베가 내놓은 게 ‘인신매매의 희생자’란 새로운 논리란 설명이다. 물론 한국은 가당치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아베는 “방미 기간 중 이 표현을 통해 국제사회를 설득하면 한국도 입장을 바꿔 협상 입구로 들어올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방미 사전 정지작업 차원에서 이달 중 모종의 조치를 전격 발표하려는 긴박한 움직임도 있다.

 한·일 간의 ‘5종 세트 vs 3대 조건+1.5종 세트’, 여기에 미국까지 가세한 치열하고 복잡한 샅바싸움.

 하지만 그 기한은 얼마 남지 않았다. 6월 22일(국교정상화 50주년), 늦어도 8월 15일(종전 70주년)이 지나면 그나마 동력마저 상실할 것이란 사실을 한·일·미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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