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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퇴 시대] 퇴직 후 피자집 한다니 … 도와줄 셰프 연결해 주는 회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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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대기업 생활 20년째. 대학 졸업 후 샐러리맨으로만 살아온 현대카드 차장 김형건(44)씨는 지난달 말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4년차 차장. 카드업계에서 세일즈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한참 공부할 나이인 고2·초1 두 자녀와 아내가 있다. 그의 다음 직함은 ‘피자집 사장님.’ 퇴직금 7000만원에 1억원이 넘는 대출금을 보태 가게를 연다. 주변에서 쏟아진 숱한 만류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직장 상사와 동료들까지 “조직 나가 성공하기가 쉽겠냐”며 걱정을 보탰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는 드라마 ‘미생’ 속 대사가 유행이었다. 김씨는 “아내를 설득하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며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막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현대카드의 ‘CEO 플랜’
6개월 간 전문가 상담에 해외 시찰
디자인팀서 인테리어 도움 주고
브랜드팀은 가게 이름 지어주고
개업 뒤에는 홍보·마케팅 조언도

자영업자 줄폐업 속 회사가 버팀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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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을 해도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반퇴시대다. 대기업 정규직 평균 근속연수 10년 8개월. 30~40대 조기퇴직자가 속출하는 이유다. 하지만 올 초 현대경제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40대 자영업자는 전체 폐업자의 45.3%를 차지한다. 특별한 기술 없이 퇴직금만 갖고 덜컥 치킨·피자집을 열었다 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세청이 지난해 10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매년 자영업자 80만명 가량이 폐업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퇴직 푸어(Poor)’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김씨도 겉보기엔 다른 퇴직자들과 다를 바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의 과감한 결정 뒤에는 숨은 버팀목이 있다. 김씨는 현대카드가 올해 처음 시행하는 퇴직 직원 창업 지원 프로그램 ‘CEO 플랜’의 1호 대상자다. 지난해 9월 선발돼 6개월 간 집중 훈련을 받은 끝에 첫 결실을 맺는다. 그가 오는 6일 서울 서교동에 오픈하는 피자집은 이탈리안 가정식 레스토랑을 표방한 ‘마이알리노.’ 창업 방식부터 상권 조사, 메뉴, 인테리어, 서비스 교육까지 모두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현대카드는 지난해 9월 ‘창업지원팀’이라는 별도 조직을 꾸렸다. 외부 전문가 5인과 내부 인력을 총동원해 김씨를 포함한 3명의 창업을 관리·지원하고 있다. 개별 창업을 할지, 프랜차이즈를 통할지, 자격증을 딸지를 정하는 데부터 시작해 시장성·생존율 분석이나 상권 조사, 입지 선정까지 모두 돕는다. 가게 디자인이나 메뉴 개발·서비스 교육 등 세부 준비를 지원하는 건 물론이다. 퇴직 직원이 사업을 시작한 뒤에는 운영 상황을 모니터링하며 홍보·마케팅에 관한 조언도 준다. 현대캐피탈에서는 시세보다 싼 이자로 대출금 일부를 지원한다.

 김씨의 경우 ‘먹는 장사’다 보니 성공할 수 있는 맛 비법을 전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김씨는 “6달 동안 하루 4시간씩 매일 회사 지하 식당에서 피자 도우를 빚고 숙성하는 법, 파스타를 만드는 법 등을 7성급 호텔 출신 조리장에게 직접 배웠다”고 했다. 현대카드에 고용된 셰프 12명이 돌아가며 김씨를 도왔다. 일본과 홍콩의 유명 피자집에 해외 출장도 보내줬다. 상권을 정한 뒤에는 서울 홍대~마포 인근 피자집 70여곳을 전문가와 함께 일일이 답사했다.

 이 과정은 모두 정직원 월급을 받으며 진행됐다. 김씨는 지난해 창업지원팀으로 아예 소속을 옮겨 6개월 간 현업을 떠나 창업 준비에만 몰두했다. 월급은 이전 부서에 근무할 때와 같이 계약 연봉만큼 꼬박꼬박 나왔다. 퇴직금과 저금리 대출, 무료 상담, 출장비 등 혜택을 제외하고도 회사가 인테리어 비용 등으로 별도 지원한 금액이 5000만~6000만원 가량 된다. 가게 인테리어와 외부 설계는 현대카드 디자인 팀이 도맡았다. 상호는 김씨가 돼지띠라는 점에 착안해 현대카드 브랜드 팀이 지었다. 마이알리노는 이탈리아어로 ‘어린 돼지’란 뜻이다.

 무엇보다 큰 힘은 ‘대기업의 협상력’에서 나왔다. 김씨는 “ 결국 얼마나 신선하고 좋은 식자재를 쓰느냐에 성패가 달려있 다”고 했다. 마이알리노는 현대카드 본사 사옥 식당에 식자재를 납품하는 전문 업체에서 대기업 납품가와 같은 가격으로 식자재를 공급받을 계획이다. 김씨는 “피자가게 운영은 스무 살 상경했을 때부터 마음 속에 담았던 꿈”이라면서 “회사에서 기회를 줘 빨리 꿈을 이뤘다. 이런 지원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당장은 직장생활을 더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했다.

“동료들에게 CEO 인생 지원하는 취지”

 그렇다면 회사가 이렇게까지 퇴직 직원의 창업을 관리·지원하는 이유는 뭘까. CEO플랜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는 현대카드 황유노 부사장은 “ 이미 국내 카드·캐피탈 시장은 포화상태가 됐다. 직원 중에 퇴출자가 생기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면서 “그들이 회사에 기여한 만큼 회사도 그들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게끔 도울 책임이 있다”고 설명했다. 고령화 사회를 맞아 “직원 입장에서 가장 회사 도움이 필요할 때 퇴직 후 CEO 인생을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현대카드는 상반기 중 서울 영등포에 창업지원센터 ‘CEO 라운지’를 열어 회의실과 집무실, 교육장 등을 사내 예비 창업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게 할 계획이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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