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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 이만하면 잘한 거 맞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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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우는 아들 차두리(왼쪽)와 눈물을 글썽인 채 웃고 있는 아버지 차범근. 차두리는 경기 후 “너무 축구를 잘 하는 아버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근처에 못가니까 속상했지만,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고 롤 모델로 삼은 아버지가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양광삼 기자]
결승골을 넣은 이재성(왼쪽) 등 대표팀 후배들이 벤치에 있던 차두리를 얼싸안았다. [뉴시스]

그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한참을 흐느꼈다. 자신의 축구 인생을 뒤덮었던 깊은 그림자.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벽 같았던 존재. 꽃다발을 들고 나온 아버지 차범근(62)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차두리(35·FC 서울)가 입을 열었다. “전 분명 해온 것 이상으로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 잘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열심히 하려고 애썼고…”

 그랬다. 그는 아버지를 이겨보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래서 ‘차미네이터’가 되었고, 15년간 간직했던 태극마크를 영예롭게 반납할 수 있었다.

 31일 서울월드컵경기장. 한국 축구대표팀과 뉴질랜드의 평가전은 차두리의 은퇴 기념경기로 치러졌다. 전반 43분. 슈틸리케(61) 감독은 예고한 대로 차두리를 교체아웃 시켰다. 임시 주장을 맡아 오른쪽 수비수로 출전한 차두리는 대표팀 주장 기성용(26·스완지시티)에게 주장 완장을 넘겨주며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이어 손흥민(23·레버쿠젠)과도 작별의 포옹을 했다. 손흥민은 ‘두리형 고마워’란 자수가 새겨진 축구화를 신고 나왔다.

 차두리가 김창수(30·가시와)와 교체되는 순간, 모든 관중은 ‘차두리 고마워’라고 적힌 빨강색 응원도구를 흔들고, 기립 박수를 보냈다. 뉴질랜드 선수들도 박수를 쳤다.

 “두리 형에게 승리를 선물하자”고 다짐했던 후배들은 약속을 지켰다. 후반 41분 김보경(26·위건)의 슈팅이 골키퍼를 맞고 흐르자 이재성(22·전북)이 밀어넣었다. 선수들을 벤치에 앉아 있던 차두리에게 달려가 안겼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기고 대표팀 은퇴하라”며 은퇴경기를 마련해줬다. 한국이 1-0 승리를 거뒀고, 차두리는 이기고 떠났다.

 ◆이젠 지도자 차두리, 축구인생 연장전=“두리 형을 만나 많은 것을 얻었다.” 기성용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 기성용은 2009년 12월 스코틀랜드 셀틱에 입단했지만 주전경쟁에서 밀려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홀로 지내면서 밥에 간장·달걀을 비빈 ‘간장계란밥’만 한달 내내 먹은 적도 있다.

 7개월 뒤 차두리가 셀틱에 합류했다. 기성용은 “오후 5시가 되면 ‘집으로 밥 먹으러 오라’는 형의 문자 메시지가 정말 좋았다”고 회상했다. 기성용은 훈련이 끝나면 차두리의 집으로 달려가 함께 밥을 먹고 TV를 봤다. 셀틱 초기 기성용은 거친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차두리는 “패스만 하지 말고 필요하면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라”는 조언을 해줬다.

 차두리와 2년간 한솥밥을 먹은 기성용은 유럽 톱 클래스로 성장했다. 차두리는 “2년간 성용이가 엄청나게 발전한 것을 지켜보니 정말 뿌듯했다. 내가 감독이 된 것 같았다. ‘감독님들은 이런 기분이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K리그에서 올해 11월까지 뛰고 현역에서 은퇴한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지도자 자격증을 딸 계획이다.

 차두리는 아버지가 1998 프랑스 월드컵 대표팀을 맡았다 성적 부진으로 중도 경질되는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감독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안다. 하지만 자신의 보살핌 아래 성장한 기성용을 보며 지도자를 자신의 꿈에 포함시켰다.

 차두리는 후배들을 이끌면서 리더로서 충분한 자질을 보여줬다. 2014년 5월 튀니지와 평가전에서 왼손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한 기성용은 새벽 2시에 차두리에게 전화를 걸어 “형, 너무 긴장한 탓에 큰 실수를 했어”라고 하소연했다. 기성용을 애칭 ‘기똥이’라 부르는 차두리는 후배를 진심으로 위로해줬다.

 2008년 손흥민이 독일 함부르크 입단 테스트를 받을 때도 차두리가 도움을 줬다. 독일어가 서툰 손흥민을 위해 통역을 자처했다. 지난 1월 아시안컵 대표팀 코치였던 신태용(45) 올림픽팀 감독은 “두리가 후배들을 정말 잘 챙기고, 후배들도 두리를 잘 따랐다. 좋은 감독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자질을 갖췄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난 선수 시절 빛만 보신 아버지와는 다르다. 나도 잠깐 빛을 본 적이 있지만 어둠도 익숙하다”며 “후보들, 새내기들, 막내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말했다. 차두리는 벤치의 설움, 2부리그 강등 등 축구 선수로서 산전수전을 겪었다. 차 감독도 “두리는 나보다 훨씬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다. 지도자도 잘 할 것 같다”고 했다.

 차두리는 이날 경기 뒤 “내 축구인생은 3-5로 지고 있다. 종료 직전 골대만 두 번 맞혔다”고 말했다. ‘선수 차두리’의 축구인생은 3-5로 끝났다. 하지만 ‘지도자 차두리’는 5-5 동점은 물론 아버지를 넘어 6-5 대역전승을 거둘 가능성도 있다. 차두리의 휴대전화 SNS 문패에 달린 독일어 문구는 이렇다.

 ‘Meine beste Zeit kommt noch(내 최고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글=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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