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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민주정치와 국가 운영의 효율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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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민주정치가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담보하는 데 필수요건임은 쉽게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가 과연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는 간단히 대답하기 어렵다. 제국주의 시대와 이데올로기 시대, 그리고 세계대전과 냉전의 처참한 경험을 뒤로하고 21세기를 맞게 된 지구촌에서는 민주화와 시장화가 역사의 주류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계는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테러가 빈발하는 긴장의 국면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과연 민주주의가 국가나 국제 체제의 안정된 운영을 보장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불확실성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창립 130주년을 맞는 연세대와 부설 김대중도서관이 주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도 ‘민주주의와 거버넌스의 미래’라는 주제로 토론이 있었다. 케임브리지대의 존 던 교수는 환경 보호, 경제 발전, 공정한 사회 건설이란 기존의 민주정치 목표에 더하여 고령화를 포함한 인구 문제까지 효율적으로 처리할 국가 운영을 어떻게 담보할지를 걱정하며 이탈리아나 그리스 같은 비효율의 예를 들었다. 또한 중국처럼 높은 효율성을 과시하는 경우에는 권력 집중과 남용을 견제하는 권력 분립의 제도화와 집행의 법제화가 필수적이란 견해도 덧붙였다.

 이러한 전통적 서구 민주이론의 관점에서 지구 공동체와 국가의 효율적 관리를 연계시킨 던 교수의 입장과는 달리 베이징대의 판웨이 교수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변화는 서구의 이론과는 달리 중국 고유의 사회 전통과 조직의 결과임을 강조했다. 가족과 지역공동체를 기초로 한 사회 조직과 윤리, 그리고 민본주의와 우수 인재 등용의 합리성이 수용돼 온 중국의 정치 전통에서는 국가 운영에 실패한 집권자는 집단적 반란으로 교체될 수밖에 없으므로 여야 경쟁 구도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 시스템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국가와 시장의 대치 관계는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 교수의 입장이다.

 연세대 국제회의로부터 열흘 후인 3월 23일 싱가포르 건국 총리인 리콴유가 세상을 떠났다. 민주화의 진전 없이도 경제의 고도 성장과 선진형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대정치가였다. 사회적 규율을 엄격한 국가 권력의 집행으로 유지하는 한편 과감한 시장경제와 개방 정책으로 싱가포르를 단숨에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시킨 국가 운영의 전설적 달인이었다. 리콴유의 이른바 유교자본주의와 덩샤오핑의 과감한 시장경제 도입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도시국가에서의 실험이 대륙국가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 10여 년 전 서울 방문 때는 그의 중화 중심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한국은 특히 오랜 역사의 교훈을 살려 중국과의 관계를 잘 조정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리콴유식 권위주의적 국가 운영의 성공은 무엇보다도 부패를 철저히 차단한 데서 비롯됐다. 그와 더불어 최고의 인재들을 등용하고 공개적으로 응분의 대우를 제도화한 것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그렇게 발탁된 엘리트의 한 사람인 키쇼어 마부바니(Mabubani) 전 유엔대사의 ‘오늘의 싱가포르 젊은이들은 국가에 감사하면서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기에 이제 변화는 오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는 바로 리콴유의 선택이 현명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리콴유 별세 사흘 전인 3월 20일 호주의 맬컴 프레이저(Fraser) 전 총리도 세상을 떠났다. 1975년 특별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을 출범시켰던 프레이저 총리는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을 중시한 보수적 재정 정책을 고집했으나 인권과 국제법을 강조한 국제주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감옥에 있던 넬슨 만델라도 찾아보며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철폐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베트남 난민을 포함한 아시아로부터의 이민을 과감히 수용하고 호주를 다인종·다문화 국가로 변형시킨 대중에 앞서가는 그의 획기적 정책은 국제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였던 프레이저의 면모를 보여준 예로 길이 평가될 것이다.

 우리 한국에 민주정치와 효율적 국가 운영은 택일의 여지없이 동시에 추구할 수밖에 없는 목표이다.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민주주의를 지켜 가겠다고 여러 번 국민적 합의를 다짐했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방만한 국가 운영의 구실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곧 나라도 민주주의도 함께 망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민주정치와 국가 운영을 상호보완적 순환 관계로 만들어 나가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