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추모 행렬 … 직장인들 출근 전 새벽 조문 복받친 국립대 교수, 세미나 포기하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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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호 06면

독립 전인 1963년 총선에서 인민행동당(PAP)이 압승을 거두자 지지자들이 리콴유를 목말 태우면서 기뻐하고 있다. [AP=뉴시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가 나라를 건국한 지 정확히 5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싱가포르에는 추모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그의 시신이 총리 관저 이스타나에 안치돼 가족과 일부 사람만 조문할 수 있을 때에도 수많은 국민이 이스타나 문 앞에 와서 꽃다발과 추모사를 쓴 편지 등을 놓고 갔다. 시신이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일반인들이 조문할 수 있게 된 3월 25일에는 8시간이 넘게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싱가포르 정부는 조문 마감시간을 계속 늘리다가 결국 24시간 조문체제로 바꿨다. 출근하기 전에 조문하려고 오전 3~4시에 나오는 직장인들이 또 줄을 이었다.

국부 떠나 보내는 싱가포르 표정

 필자가 매주 참여하는 연구모임을 주재하는 싱가포르인 교수는 리콴유 서거 다음날 아침 상기된 표정으로 나와 감정이 복받쳐 못하겠다며 영국인 교수에게 대신 회의를 주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싱가포르국립대에서 열린 추모 모임에도 1000명 이상의 교직원·학생이 모였다. 리콴유 장례식 하루 전인 28일 필자와 저녁식사 약속을 잡았던 친구는 그날 노모(老母)를 모시고 조문을 꼭 가야 하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니 약속을 연기하자고 연락이 왔다.

 무엇이 싱가포르인들로 하여금 리콴유를 이렇게 그리워하게 하는가?

 아들 리셴룽 총리는 “리콴유는 싱가포르다”고 말한다. 실제로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만들었고, 싱가포르가 잘되도록 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7년 전 건국기념일 행사에서 리콴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병상에 누워 있거나 묘지에 묻혀 있더라도 싱가포르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껴지면 나는 벌떡 일어날 것이다.” 싱가포르인들은 이 말이 리콴유의 진심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리콴유는 지금 저승에서도 싱가포르가 잘되고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뭔가 잘못된다고 생각하면 이승으로 돌아올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리콴유(왼쪽)가 1978년 싱가포르를 방문한 덩샤오핑 당시 중국 부총리를 환영하면서 악수를 하고 있다. [신화=뉴시스]

 싱가포르인들에게 리콴유는 무서우면서 존경하는 지도자였다. 아들 리셴룽 총리가 큰 눈에 서글서글한 인상이고 부드럽게 얘기하는 것과 달리 리콴유는 눈도 작고 날카롭게 얘기한다. 리콴유가 젊었을 때 연설하는 장면을 보면 섬뜩해지는 것들도 있다. 그는 평생 강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국민에게서) 사랑받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리콴유가 국민에게서 사랑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추모 열기가 뜨겁겠는가. 싱가포르인들이 리콴유를 가장 인간적으로 느꼈을 때는 아마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 연방 합류가 비극으로 끝났을 때였을 것이다. 화교와 말레이인들 간에 인종 분규가 벌어지고 유혈사태로까지 치달았다. 말레이시아는 1965년 8월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리콴유는 기자회견을 하며 “평생 나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의 통합을 믿어 왔다”고 말한 뒤 눈물을 닦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리콴유는 이 눈물을 딛고 아무것도 없던 조그만 섬나라를 미국보다 더 잘 사는 나라로 발돋움시켰다.

 리콴유가 싱가포르에 남겨 놓은 가장 큰 유산은 ‘깨끗하면서 기업가적인 정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리콴유는 처음 정권을 잡고 총리에 취임할 때 다른 각료들과 함께 하얀색 셔츠와 하얀색 바지를 입었다. 청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영국 통치하에서 각종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국민에게 새로운 정부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나 다른 주변 동남아 국가들과는 차별화된다는 자부심을 심어 주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공무원들이 청렴하면서도 국가를 위해 열심히 뛰게 만들기 위해 리콴유는 ‘당근과 채찍’의 양면정책을 썼다. 리콴유는 공무원들의 월급을 대폭 올렸다. 능력 있는 인재들을 민간 부문에 빼앗기지 않고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싱가포르 고급 공무원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다. 현재 리셴룽 총리의 연봉은 200만 싱가포르달러(약 16억원)가 넘는다. 공무원들이 너무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비판에 따라 3분의 1 이상을 삭감했는데도 세계 정치지도자 중 최고 연봉이다. 차관급만 돼도 연봉이 100만 달러(약 8억원)가량 된다. 아주 유망한 관료는 30대 초반에 30만 달러(약 2억4000만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놨다. 공무원들 입장에서 보면 열심히 일해 월급만 잘 저축해도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까 부정부패를 할 유인이 없도록 만들어 놓은 제도다.

 반면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다. 총리 직속으로 있는 부패행위조사국 (CPIB)은 어느 나라의 기관보다 광범위한 권한이 있다. 한국은 장차관 정도로 거명돼야 재산 형성 내용에 대해 검증을 받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모든 공직자가 CPIB로부터 문의가 들어왔을 때 보유 재산의 형성 내용을 밝혀야 한다. 해명하지 못하는 재산은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

 무엇보다 리콴유 본인이 부정부패를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84년 당시 국가개발부(Ministry of National Development·한국의 국토교통부에 해당)의 테칭완 장관이 건설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정보가 CPIB에 포착됐다. 테칭완은 CPIB 고위 관료에게 자신의 죄를 ‘조정(bargain)’하려 했고 리콴유에게 따로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다. 리콴유는 “조사가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다”고 응답했다.

 일주일 뒤 테칭완은 자살했다. 리콴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총리 각하… 저는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동양의 신사로서 제가 한 잘못에 대해 최대의 벌칙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의 기적은 정부가 만든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기업인들처럼 움직인다. 외국인 투자자들을 위해 ‘원스톱 서비스(One-stop service)’ 체제를 처음 만든 곳도 싱가포르다.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은 금융감독 및 정책 기능을 뛰어넘어 투자은행·헤지펀드·연기금 등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니며 비즈니스를 한다. 리콴유도 은퇴한 뒤 아들 리셴룽 총리와 함께 중국을 방문해 싱가포르가 홍콩에 준하는 위안화 역외거래센터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냈다. 싱가포르가 국제금융센터로 발전한 데는 정부의 결집된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리콴유가 남겨 준 싱가포르의 경쟁력은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반 위에서 후대의 지도자들이 갈수록 다양해지는 정치적 요구들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에 싱가포르의 미래가 달려 있을 것이다.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경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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