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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단 요리사 말도 메뉴 개선에 반영 주방의 민주주의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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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호 32면

일러스트=박용석

요리사가 되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다.

셰프가 쓰는 셰프이야기<1> 파리 파크 하얏트 방돔 장 프랑소아 후케트 총괄 셰프

어려서부터 요리에 흥미를 갖고 요리학교를 졸업해 요리사가 되는 전형적인 유형, 요리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다가 뒤늦게 들어서는 유형, 그리고 요리사 집안에서 자라 요리의 세계로 입문할 운명을 갖고 태어난 유형 등이다.

유명 요리사가 된 이후의 행보 역시 여러 갈래로 나뉜다. 스타 요리사로 각광 받은 후 인지도를 등에 업고 본격적인 비지니스를 펼치거나, 새로운 요리를 연구하기보다 지금까지 선보인 레시피를 담은 요리책을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한다.

뭐든 좋다. 요리사 타이틀을 걸고 다방면에서 재능을 선보이는 게 요리사의 격을 높여주기도 하니까.

한가지 분명한 건 일단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하고 있다면, 본인의 바쁜 스케줄과 상관없이 음식에 대한 퀄리티를 언제나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방에 셰프가 있느냐 없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프랑스 리옹의 요리 학교 폴 보큐즈 졸업 후 스타쥐(인턴)를 끝내고 파리에 와 처음 일한 곳은 유서 깊은 호텔 크리용(Hotel de Crillon)이었다.

프랑스 요리사의 이직율은 높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버터와 치즈 대신 고추장·된장에 길들여진 한국인 입맛의 요리사라 여러모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태생적으로 프랑스 현지 요리사와의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에, 한번 주방에 들어간 이상 모든 파트를 섭렵하고 나오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고기나 소스 파트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2~3년을 악착같이 버텨낸 결과 모든 파트를 돌아볼 수 있었다.

이후 호텔 포시즌 파리 조지 상크(Hotel Four Seasons Paris G.V)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 르 상크(Le V)에서는 분자요리를 비롯해 파인 다이닝에서 펼칠 수 있는 수없이 다양한 요리 변주를 엿볼 수 있었다.

지난해 서울 파크 하얏트 갈라디너를 위해 내한한 후케트 셰프(가운데)와 김민규 셰프(왼쪽). 오른쪽은 후케트의 수셰프인 마크 얀시.

이곳의 요리 스타일에 익숙해져 갈 무렵 같이 일하던 마크 얀시가 장 프랑소아 후케트 셰프가 있는 파크 하얏트 방돔에서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후케트는 호텔 크리용의 장 프랑소아 피에주나 르 상크의 에릭 브리파 셰프만큼은 아니지만 파크 하얏트 방돔이 팔래스급 호텔(프랑스의 5성급 호텔 가운데 234개의 심사 항목과 프랑스관광개발기구의 1차 심사, 그리고 업계 관계자 10명의 2차 심사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는 칭호)로 부상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르 퓨어(Le Pur)를 이끄는 수장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소중한 인연이 되었다. 내가 평생 걸어야 할 요리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을 배웠기 때문이다.

면접을 보러 간 날 처음 마주한 후케트는 장대한 키와 건장한 체격 때문인지 좌중을 압도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막상 접해보니 이런 첫인상과 달리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전혀 없는 열린 사람이었다. 특히 주방 직원 중 14년 넘게 손발을 맞춰 온 한국인과 일본인 요리사가 있어 동양인에 대한 이해가 높았다.

레스토랑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메뉴 개편을 한다. 제철 식재료와 셰프가 고안한 아이디어를 밑그림으로 레시피를 정한다. 셰프의 고유권한으로, 일반 요리사 위치에서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리에 절대적인 레시피란 없다. 제 아무리 훌륭한 재료를 갖고 있더라도 매일 매순간 주방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므로 실제 라인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의 넓은 시야와 재빠른 판단력이 앞서야 할 때가 많다.

후케트는 주방 흐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셰프였기에, 단 한번도 새 메뉴 구상을 끝낸 후 레시피만 아래 요리사들 손에 쥐어주며 “이대로 요리를 만들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하지 않았다. 재료 손질부터 플레이팅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자신이 구상한 요리가 완성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주방의 막내 꼬미를 포함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의견을 최대한 수용해 음식에 반영했다. 돌이켜보니 주방 구성원들 모두가 성취감을 느끼며 즐겁게 일하도록 만드는 탁월한 리더십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매년 11월 살롱 뒤 쇼콜라(Salon du Chocolat)라는 성대한 초콜릿 박람회가 열린다. 세계 각국의 초콜릿 브랜드들이 부스를 만들어 현장에서 판매를 하고, 각 나라 대표 쇼콜라티에들은 초콜릿 콩쿠르를 벌인다. 패션 디자이너는 초콜릿으로 만든 의상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축제가 벌어진다. 프랑스 최고 요리사들은 초콜릿을 주제로 한 요리를 대중에 공개한다.

후케트는 2013년 살롱 뒤 쇼콜라에서 화이트 초콜릿 소스를 곁들인 관자요리를 선보였다. 시연 바로 전날 주방에서 후케트를 만났더니 다음날 살롱 뒤 쇼콜라에 선보일 요리를 맛 보라고 권했다. 먹고 나서 나는 조심스레 관자요리에 어울릴만한 한국 소스 한가지를 추천했다. 레몬식초가 들어간 한국 초간장이었다. 상큼하고 뒷맛이 개운한 초간장 맛을 보더니 후케트는 당장 그 다음날 메뉴의 레시피를 수정했다. 초간장을 넣어서 말이다. 출격 준비를 모두 끝낸 시점에서 재료와 레시피를 바꾸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에게 가장 놀랐던 건 이렇게 현장에서 직접 뛰는 요리사가 내놓는 작은 의견을 놓치지 않고 수렴해 요리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할 줄 아는 열린 사고방식이었다.

파크 하얏트 방돔에는 아침 점심에만 문을 여는 캐쥬얼 레스토랑 오키데(ORCHIDEES)와 저녁에만 문을 여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르 퓨어가 있다. 두 곳 모두 후케트만의 뚜렷한 요리 철학이 녹아 있다. 바로 원재료가 가진 고유의 식감을 유지하며 자연스러운 풍미·질감·색조를 강조한 요리를 선보이는 것이다.

후케트가 만든 식전요리인 아뮤즈 부쉬.

후케트의 요리에는 그의 온화하고 매력적인 인품도 함께 녹아있다. 그는 최고급 식재료, 그리고 혀와 눈이 즐거운 화려한 플레이팅보다 소박한 꾸밈새일지라도 건강을 생각하고 재료 본질을 중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음식을 먹고 나서 “아, 배 부르게 잘 먹었다”는 포만감에서 오는 즐거움 역시 간과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많이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요리 외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주방의 수장이 가져야 할 맨 파워와 리더쉽, 그리고 원활한 팀웍을 유지할 수 있는 유연한 소통력을 지녔던 후케트를 떠올린다. 함께 일하는 사람의 마음을 보듬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요리를 이끌어내는 요리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김민규 메종 드 라 카테고리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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