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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사랑, 힐러리에겐 양날의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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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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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적인 행사였다. 지난해 12월 중순 미국 뉴욕 럭셔리호텔인 콘래드에 월스트리트(월가) 엘리트들이 모였다. 세계 최대 투자은행 골드먼삭스 투자은행 부문 대표인 티모시 오닐이 사회를 봤다. 당시 비즈니스위크는 “한 유명 여성이 오닐의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올라섰다”고 전했다. 바로 힐러리 클린턴(68) 전 국무장관이었다.

 뉴욕타임스(NYT)는 “힐러리가 그날 한 연설의 핵심은 ‘월가가 나쁜 곳이 아니다’였다”고 보도했다. 월가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했던 말이다. 그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악덕 돈놀이꾼(Money-monger)’이라고 비난받았다. 심지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그들을 ‘살찐 고양이(Fat Cat)’라고 불렀다. 그들이 천문학적인 구제금융을 받았으면서도 거액의 보너스를 챙겨서다.

 월가의 대변인으로 통하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금융인들이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며 “그들이 경제에 기여한 몫을 정당하게 평가해줘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반향이 없었다. 월가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인이 겪고 있는 고통이 너무 컸다.

 월가의 정치 영향력도 줄어들었다. 월가의 주류는 2012년 공화당 미트 롬니 후보를 지원했다. 하지만 오바마가 재선됐다. 당시 로이터는 “월가가 미는 후보가 대선에서 이긴다는 속설이 깨졌다”고 평했다. 사실 당시 월가는 돈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도 못했다. 미 정치전문 매체인 슬레이트는 “월가는 공화당 정치자금 순위에서 카지노 억만장자인 셸던 아델슨 등에게 밀렸다”고 했다.

 요즘 상황이 좀 바뀌고 있다. 실업률이 올 2월 5.5%까지 떨어졌다. 세계 선진국 가운데 미국 경제만이 잘 굴러가고 있다. 슬레이트는 “월가가 명예회복을 꾀하려 한다”고 최근 보도했다. 금융위기 사슬에서 벗어나려 한다는 얘기다. 마침 경제 회복에 이어 정치적 변화도 다가오고 있다. 2016년 대선이다.

 비즈니스위크는 “월가 사람들이 민주·공화 양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참가할 만한 인물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며 “그들 가운데 현재 월가 사람들이 가장 주목하는 인물이 바로 힐러리”라고 전했다.

 월가 사람들에게 힐러리는 ‘금융 전성기’인 199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금융 족쇄가 줄줄이 풀렸던 때다. 이전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졌다. 시중은행·투자은행·보험회사가 한 몸이 됐다. 씨티그룹이 대표적인 예다. 이때 미 대통령이 바로 힐러리 남편인 빌 클린턴이었다.

 힐러리도 월가 사람들의 향수를 최대한 자극하려고 했다. 지난해 12월 콘래드호텔 모임에 남편을 대동했다. 양쪽의 장단이 잘 맞고 있는 셈이다. 사실 힐러리-월가 관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힐러리는 2001년 백악관을 나와 상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의 가장 든든한 정치자금 후원자는 월가였다.

 미 정치자금 감시단체인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힐러리에게 가장 많은 돈을 지원한 곳은 씨티그룹과 골드먼삭스, JP모건 등 월가 금융그룹들이었다. 반면 오바마의 돈줄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정보기술(IT) 기업이나 캘리포니아대와 같은 대학이었다. 두 사람 모두 민주당 소속이지만 배후 기업들의 성격은 딴판인 셈이다.

 진보적인 딘 베이커 경제정책연구소(CEPR) 공동 소장은 “빌과 힐러리 클린턴은 19세기 후반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었던 그로버 클리블랜드(1837~1908년)와 비슷하다”고 했다. 클리블랜드는 민주당 출신이었지만 월가와 가장 가까웠다. 그는 월가가 좋아하는 금본위제를 지지했다. 당시 미국은 1990년대 일본처럼 극심한 디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빚을 많이 진 농민과 노동자들은 월가가 음모를 꾸며 금본위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2008년 위기 이후만큼이나 월가에 대한 원성이 컸다.

 힐러리도 월가의 지원을 바라고 있다. 미국 엘리트 집단과 소원하면서도 대선에 승리한 사람은 오바마 등 몇 명에 지나지 않아서다. 하지만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선 월가와 친하다는 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남편 클린턴 시절과는 다른 흐름이다. 당시 월가 이미지는 주식 투자의 대중화 때문에 좋았다. 하지만 힐러리에게 월가는 양날의 칼이다.

 이미 민주당 좌파들이 힐러리 공격에 나섰다. 진보적인 매체인 폴리티코는 “힐러리와 월가의 커넥션이 다시 단단해지고 있다”며 “2016년 대선에서 그는 더욱 친(親)월가 후보가 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야후의 온라인 사진공유 사이트인 플리커엔 골드먼삭스-힐러리 관계를 비판하는 그래픽이 나돌고 있다. 이들은 2008년 민주당 경선에서 힐러리 대신 오바마를 당선시킨 주인공들이다.

 요즘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개인 e메일 주소를 쓴 사실이 드러나 구설에 시달리고 있다. 예비 검증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올해 말께 당내 경선이 시작되면 월가와의 커넥션이 다시 문제가 될 전망이다. e메일 구설수보다 파괴력이 클 수 있다.

 힐러리는 어떻게 돌파할까. 구체적인 단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선거 참모진을 개편했다. 코카콜라 광고마케팅을 지휘한 웬디 클라크를 영입했다. 기업의 돈벌이와 사회 발전을 융합시켜 광고하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덕분에 건강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코카콜라 이미지가 최근 좋아졌다는 평가가 있다. 힐러리가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지는 클라크가 마케팅 마법으로 그의 친월가 이미지를 얼마나 잘 포장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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