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자존심도 접었다 … 백화점, 진열품 할인전까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지난달 26일 신세계백화점 전사 임원회의실. 27명의 임원이 가장 많이 언급한 말은 ‘플랫폼’이었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서나 쓰일 법한 말이지만 참석자들은 “이제 백화점이 하나의 플랫폼이 돼 고객들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 플랫폼만 이용하도록 유도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입을 모았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 임원은 “언제까지 식상한 바겐세일이나 할인행사에만 매달릴 수 있겠느냐”며 “인터넷이든 매장이든 다른 데선 볼 수 없는 참신한 자체 상품을 발굴해 삼성 팬, 애플 팬 같은 충성도 높은 고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통업계의 강자로 군림해 온 백화점업계가 공포에 휩싸였다. 대형마트에서나 볼 법한 특설매장이나 초특가 세일 같은 온갖 방안을 동원해도 실적 추락세를 막기가 버거워지고 있어서다. 이미 불길한 조짐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백화점업계는 지난해 10년 만에 처음으로 매출이 꺾이는 ‘굴욕’을 당했다. 2014년 국내 백화점 매출은 29조2000억원,으로 전년보다 1.9%가 줄어들었다. 마이너스 성장을 한 건 1995년 통계 집계 이래 IMF 외환위기(98년), 카드사태(2003~2004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원인도 어느 때보다 복합적이다. 장기 불황과 내수 침체 상황에서 온라인·모바일 쇼핑과 해외 직접구매(직구) 쪽으로 고객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있어서다. 무엇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움츠러든 소비심리가 연초 연말정산 파동으로 아예 얼어붙었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KDB대우증권 이준기 연구원은 “백화점은 국내 내수 소비의 성장과 함께 발전해 온 산업으로 구조적인 저성장기에 돌입했다”며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선 단순히 매장을 낸다고 크게 성장하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A백화점 영업전략담당 임원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성장이 아니라 ‘스테이(현재 수준 유지)’가 제1 목표가 될 지경”이라며 절박한 심경을 드러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백화점업계의 생존 경쟁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화두는 차별화다. 남들이 하는 걸 따라만 하다간 ‘결국 같이 죽는다’는 얘기다. 아베노믹스 덕분에 모처럼 활력을 찾은 일본 백화점업계를 벤치마킹하려는 움직임도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롯데백화점은 업계 1위라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알뜰족’의 입맛에 맞춰 중고시장을 파고들었다. 오는 13일부터 19일까지 본점에서 삼성전자·휼렛패커드(HP)·도시바 등 유명 디지털·가전 브랜드의 ‘리퍼브 상품’을 정상가보다 30~70% 싸게 팔기로 했다. 리퍼브 상품은 구매자의 변심으로 반품되거나 미세한 흠집이 있는 제품, 전시장에 진열됐던 제품을 보수하고 재포장한 ‘재공급품’이다. 생활가전부문 김석곤 선임바이어는 “리퍼브 상품전은 그동안 백화점업계에선 볼 수 없었지만 알뜰 쇼핑족들 사이에서 트렌드가 되고 있어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은 철저히 ‘문화&아트’에 집중한다. “다른 업태와 차별화되는 백화점의 본질은 문화와 아트, 고품격 상품이기 때문”이라는 게 정지영(상무) 영업전략실장의 설명이다. ‘일디보’나 ‘니요(Ne-Yo)’ 등을 초청한 ‘슈퍼스테이지’ 콘서트는 이미 인지도가 상당하다. 지난해 6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연 ‘쿠사마 야요이 특별전’엔 14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몰려 예술의전당 최근 10년간 일평균 최대 관객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식품 분야에서도 해외 다양한 식문화를 소개하는 데 주력한다. 오는 8월 국내 최초로 판교점에 들어설 이탈리아 식자재 전문점 ‘이틀리(EATLY)’가 대표적이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은 뉴욕에서 이틀리 매장을 발견하고 담당 고위 임원을 직접 이탈리아 밀라노로 보내 설명회를 하는 등 이틀리 국내 입점에 큰 공을 들였다.

 신세계백화점은 여느 디자인·의류업계 못지않은 ‘패션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부터 봄·가을 두 차례 유명 디자이너와 협업해 진행하는 ‘러브잇(LOVE IT)’ 패션 행사가 대표적이다. 올해는 에르메스 출신 디자이너 피에르 아르디와 손잡고 큐브 무늬가 담긴 셔츠와 재킷 등을 선보였는데 이틀 만에 완판되는 기록을 세웠다. 게다가 이 행사로 인해 내수 침체에 가장 큰 영향을 받던 여성의류 매출이 11.9% 증가하고 남성의류(10.9%), 명품(11.7%), 준명품의류(15.5%) 등도 매출 성장 효과가 쏠쏠했다. 고광후 상품개발(MD)전략담당 상무는 “트렌디하고 국내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를 발굴해 소개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