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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에 무료로 영어 가르치는 외국인 모임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8일 서울 을지로 주민센터. 외국인·한국인이 섞인 청중 30여 명 앞에 탈북자 이성주(29)씨가 나섰다. 그의 입에선 유려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Of course, I needed money, but more than that, I needed a friend. I needed an open heart, an open mind, an ear to listen to my dream, and a mouth to sing with me….(물론, 전 돈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열린 가슴과 열린 마음, 내 꿈을 들을 귀와 함께 노래할 입이 필요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북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가’를 주제로 열린 영어 연설 대회였다. 참가자는 모두 탈북자. 3명은 긴장이 된다는 이유 등으로 대회 직전 연설을 포기했지만 이씨 등 7명은 연설을 마쳤다. 1등으로 뽑힌 이씨는 “17살에 탈북해 한국에서 ABC를 처음 봤을 땐 글자가 아니라 그림인 줄 알았다”며 “여러 도움을 받아 영어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회는 탈북자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치는 외국인들의 모임 ‘TNKR’(Teach North Korean Refugees)이 마련했다. 한국인 이은구(36)씨와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가 2013년 3월 만든 단체다. 이씨는 교육 국책기관 연구원, 라티그는 한국 자유주의 단체 프리덤 팩토리의 국제협력실장이자 탈북자학교인 물망초학교의 국제협력자문위원이다. 두 사람은 북한 인권 관련 행사에서 만나 의기투합했다. 이씨는 “탈북자를 도울 방법을 이야기하다 내가 아는 탈북자와 라티그가 아는 원어민을 연결한 게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년간 원어민 216명이 탈북자 156명에게 연결됐다. 탈북자를 도운 이들은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리아, 뉴질랜드 국적의 교수, 교사, 학원 영어 강사, 대학원생, 프리랜서 작가 등이다. 이들에게 배운 20~40대 대학생, 직장인들은 "구직과 한국 생활 적응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지난해 영국 의회 등에서 탈북 경험을 영어로 전해 유명해진 박연미(22)씨도 이곳을 통해 18명에게 영어를 배웠다.

하지만 탈북자 중엔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포기하는 이가 많다. "어린 시절 영어를 접하지 못해 생소한 데다 영어를 번역한 한국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성주씨)이란다. 북한 정권은 여전히 “우리말보다 영어에 습관 돼야 하는 게 남조선의 현실" “현대판 식민지의 땅”(1월22일자 노동신문)이라 공격한다. 북한 사정에 밝은 탈북자에 따르면 요즘엔 북한에도 영어를 배우려는 이가 많은데 평양외국어대 출신 등에게 과외를 받으려면 일반 노동자 월급의 2배에 달하는 수업료를 내야한다.

TNKR은 성인 탈북자라면 여러 원어민과 만나본 뒤 원하는 이와 1대1로 공부할 수 있게 한다. 최근 탈북자 사이에 소문이 나 지원자가 몰려 10여 명이 연결을 기다리고 있다. 탈북자들은 영어 공부 뿐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 데 큰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3개월 넘게 공부하다 보면 탈북자가 먼저 원어민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대접할 정도로 마음을 열고 고마움을 표시한다고. 한 탈북자의 말이다. “TNKR을 통해 만난 미국인들과는 편하게 지내는데, 예전에 저를 도우려던 한국 사람들과는 불편하게 끝나는 일이 많았어요. 저를 친구가 아닌 단지 봉사 대상으로 보는 게 느껴졌거든요. 탈북자에게 친구로 다가서는 것, 그게 통일로 가는 출발점 아닐까요.”

백일현 기자 keysm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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