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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전상국씨, 새 문체의 신작 '온 생애의 한 순간'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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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산촌의 오월 한낮이 지겹도록 조용하다. 멀리 가만한 바람. 높은 산 중턱의 나뭇잎들이 희끗하니 몸을 뒤집고 있지만 이곳 남향받이 언덕에는 우거진 산록 위로 농탕치듯 내려앉은 햇살만 눈부시다.'

봄날 산골의 푸릇한 정경이 오롯하다. '멀리 가만한 바람'이라니! 손가락이 유독 긴 어느 여류 문인의 수상록에서 봤음 직한 미문(美文)이다.

그럼 이 괴이한 서술은 어떠한가. '네가 떠도는 그네를 만나는 일은 내 속의 또 하나 나인 그가 미지에게 오기 전, 내가 치르는 하나의 통과의식이다. 나에게 너로, 다시 너는 그로 분열된다.' 의식은 아무렇게나 흐르고, 문장은 부리나케 의식을 뒤쫓는다. 글 어렵기로 소문난 이인성 교수가 연상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닥터 박, 그 사람 완전히 사이코예요. ㅎㅎ, 킬킬.'

요즘 젊은 작가의 문법 실험을 따랐다. 인터넷 채팅에서 대화문 한 줄을 갈무리한 것 같기도 하고.

위 세 예문은 최근 출간된 '온 생애의 한 순간'(문학과지성사)이란 소설집에서 인용했다. 모두 한 작가의 문장이란 뜻이다. 이 변화무쌍한 문체의 주인공은, 놀라지 마시라. 8월이면 강원대 교수를 퇴임하는 예순넷 나이의 전상국 선생이다. 아주 오래 전, 살인범과 형사가 함께 길을 떠나는 이야기('동행', 1963년)를 무덤덤히 기술했던 그 작가의 글이다. 9년 만에 만난 그의 작품은 짐작보다 훨씬 젊고, 화려했다.

대신 속내는 여전했다. 작가는 예전의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대화체와 서술체를 능숙하게 오고간 '한주당, 유권자 성향 분석 사례'는 '우상의 눈물'(80년)이 다룬 권력과 부조리의 문제에 다시 주목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한 '이미지로 간다'는 작가의 인도 여행기에서 비롯했다. 인도 이미지를 한껏 살리고자 서사(敍事)는 줄이고 이미지는 펼쳤다. 그럼에도 변화한 모습은 놀랍다. 작가 경력 43년째다. 문체가 인이 박혀도 단단히 뿌리를 내렸을 때다. 진지함을 지키면서 되레 젊어진 비결이 궁금했다.

"여태 감춰왔던 감성을 드러낸 것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시도랄 수 있습니다. 젊은 작가의 작품을 꾸준히 읽습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은 꼭 찾아 읽습니다. 절망하기 위해 읽습니다. 그들의 신선함을 마주할 때마다 절망합니다. 그런 뒤에야 다시 힘을 얻습니다."

그는 책 말미 작가의 말에 '아껴둔 얘기가 좀 있다. 쥔 것 모두를 놓아버려야 하는 시간인데 글 욕심은 부끄러움을 모른다'고 적었다.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는 어르신 말씀이 귀하다.

글=손민호 기자<ploveson@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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