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최우석칼럼

한국, 필리핀 그리고 중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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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상들의 모임에선 국력에 상응해 대접받는다.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소리쳐도 소용없다. 1960년대만 해도 한국 대통령이 외국을 국빈 방문할 때 민항기를 타고 갔다. 그것도 주로 돈을 얻으러 갔다. 지금 형편으론 내년 베트남 정상회담에 당당히 전용기를 타고 가서 80평쯤 되는 호텔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원조 약속도 좀 해야 할지 모른다.

이번에 민항기를 타고 조용하게 왔다 간 필리핀의 경우는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어 많이들 배우러 갔다. 그때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한국이 100달러 정도였던 데 비해 필리핀은 180달러나 됐다.

40년이 지난 오늘 한국은 1만4000달러로 뛰어올랐고 필리핀은 1000달러가 조금 넘을 뿐이다. 그래서 요즘 필리핀 대졸 여성들이 한국에 가정부로, 간호사로 많이 온다. 돈 벌러 오는 근로자도 많다. 필리핀도 그동안 애를 많이 썼겠지만 국가 전략이 잘못됐든지, 엉뚱한 데 에너지를 썼든지 하여 이런 결과가 됐다.

한국이나 필리핀이나 미국에 많이 의존한 것이나 독재에 오래 시달리면서 살아온 점은 비슷하다. 평화적 정권교체는 필리핀이 앞섰으나 근년 들어 미군도 철수시키고 이상한 대통령을 뽑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은 연평균 7.5%의 성장을 한 반면 필리핀은 3.8%에 불과했다. 바로 이 차이가 누적돼 오늘날의 나라 형편을 가른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 성장률을 보면 한국이 3.8% 정도이고 중국은 9%가 넘는다. 이 격차가 계속되면 한국과 중국도 처지가 역전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중국을 가 보면 개발 열기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6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간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후퇴와 공백을 만회하려는 듯 경제가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으로 시달리고 있는 동안 한국은 눈부신 경제도약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다. 문민정부 이후 특히 경제 성적이 안 좋다. 정권의 정통성을 갖추고 나니 긴장이 풀어지고 노력을 덜 한 것일까. 문민정부가 시작된 93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성장률은 5%가 조금 넘을 정도인데 그동안 중국은 9% 넘게 성장했다. 이 격차도 앞으로 벌어졌으면 벌어졌지 좁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이 이 정도 성장했으니 좀 천천히 가도 되지 않느냐는 소리가 많다. 갖은 시비에 공리공론으로 세월을 보내고 엉뚱한 일을 서둔다. 그 때문에 성장 에너지가 많이 죽어 잠재 성장률이 4%대로 떨어졌다.

중국 여행을 가 보면 아직 한국 돈의 위력이 대단하다. 유명한 발 마사지라는 것도 한국 돈 2만원 정도 주면 한 시간 넘게 정성껏 서비스해 준다. 발 마사지를 받으면서 묘한 생각에 빠지곤 했다. 옛날 같으면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 호사도 한국이 지난 40여 년간 열심히 애쓴 결과일 것이다.

표면적 통계만을 보면 중국의 1인당 GDP가 1300달러 정도로 아직 한국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중국 위안화의 실질가치와 구매력을 감안하면 그 격차는 크게 줄어들 것이다. 거기다 한국과 중국의 성장률 격차가 요즘과 같이 벌어진다면 한국이 필리핀과 같은 처지가 안 된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금세기 아니, 한 세대 안에 한국의 딸들이 중국에 가정부 또는 간호사로 대거 가야 할지 모른다. 발 마사지인들 안 하겠는가. 상상만 해도 슬프고 끔찍한 일이다. 그런 사태를 막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 있을까. 그런데도 모두들 너무 모르고 무심한 것 같다.

최우석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