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 원대한 꿈 복잡한 현실, 동아시아공동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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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윗줄 왼쪽부터 노무현 대통령,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고이즈미 일본 총리. 가운뎃줄 왼쪽부터 부시 미국 대통령,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 맨 아래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림=김회룡]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노무현 정부가 ‘동북아 공동체’를 내걸고 일본의 고이즈미 정부가 ‘동아시아 공동체’를 표방하며 부산 APEC 정상회담이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를 모토로 삼았다는 사실은 지역공동체 논의가 소수 지식인의 담론 차원에서 국가 차원의 정치적 아젠다로 격상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출간된 『동아시아 지역질서』(창비 발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은 무엇이고, 과연 그 실현가능성은 있는 것인가를 점검했다. [편집자]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란 한마디로 국민국가 단위로 나뉘어져 있는 현재의 지역질서를 좀더 통합된 공동체적 질서로 바꾸자는 것이다. 유사한 시도를 앞서서 실천하고 있는 유럽연합(EU)의 경험을 중요한 역사적 진전으로 평가하면서 21세기 세계의 문명적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시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식민지 경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상호불신과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을 고려하면 공동체 구상이 매력적인 21세기 화두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이 구상은 그 매력만큼이나 불확실성과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국가들 간에는 식민지배의 부정적 유산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고 국가간 규모나 경제력의 차이가 매우 크다. 신뢰를 형성할 만큼의 상호소통의 역사도 일천하고 남북한 및 북.일, 북.미 간에는 기본적인 국가간 정상교류도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다. 무엇보다도 국민국가 중심의 발전주의, 부국강병적 지향이 매우 강력한 지역이어서 공동체론 자체가 국가주의적 논리에 포섭될 우려도 적지 않다.

또한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미국이 참여할 것인가는 현 시점에서 가장 첨예한 쟁점의 하나다. 아시아 국가는 아니지만 이 지역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이 구성원으로 포함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지고 국제적 파장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가 주도했던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안을 미국이 반대하고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지역범주를 강조한 것이나, 한국정부의 동북아 공동체론이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지 않을까하는 일각의 우려, 12월에 개최될 제1차 동아시아 정상회의에 미국이 포함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대립하였던 점 등은 모두 이런 긴장을 반영한다.

하지만 지역의 현실이 복잡하고 갈등의 잠재력이 큰 곳에서 공동체 구상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유럽에 비해 상호불신이 현저한 동아시아에서, 세계적 패권을 넘보는 중국이나 최강 경제대국 일본보다는 역내 갈등의 고통을 몸으로 체험한 한반도에서 지역공동체론은 더욱 절실한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역사적 유산과 미래전망을 한국의 시각에서 조망하려는 학술서적이 간행된 것은 뜻이 깊다. '제국에서 공동체로'라는 부제가 말하듯 이 책은 동아시아 지역이 다양한 지역질서를 경험해온 궤적을 살피고 그 맥락 속에서 공동체로의 지향을 탐색하려 한다. 특히 한반도의 입장에서 패권적 논리를 반대하고 국가주의적 대결과 대립을 넘어서려는 문명론적 문제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강대국이나 약소국이 아닌, 중간규모의 한국이 바라보는 지역통합, 공동체론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최근 일본과 중국, 한국의 연구성과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고 역사적 관점과 현재적 문제의식이 적절하게 맞물려 있는 이런 책들을 통해 현재 진행되는 공동체론의 함의를 보다 장기적 안목에서 바라보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근현대사를 일국사의 관점이나 서구보편사의 입장에서 바라보는데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지역의 역사와 미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아는데 큰 도움을 준다.

또한 각 연구자들 사이에 보이는 흥미있는 긴장감도 독자들에게는 의미 있는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체제의 성격, 대동아공영권의 사상적 한계,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등장 등에 대한 상이한 해석들은 실상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과거와 미래를 조망할 때 불가피하게 부딪치는 다면성의 반영인 셈이다.

지역 공동체의 구상은 일정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치열한 경쟁사회, 세계화의 급박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삶과 구조적인 조건, 시대적 맥락을 함께 고찰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과거의 유산을 선택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신뢰와 협조의 틀을 마련해가는 역사적 상상력과 맞물릴 때 더욱 튼실해질 수 있고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갈등과 긴장, 예상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능력은 정부 간의 전략적 협의나 경제적 계산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소수 지식인의 아이디어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상 자체가 개별 국가의 민주적 절차에 의해 걸러져야 하는 문제는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국가적 틀을 넘어서는 다양한 차원의 역내 교류, 연대, 독자적인 조직형성과 경험의 누적이 필요하다. 국제 NGO 들의 활동이나 지역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민간 네트워크가 필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담은 이 책의 출간을 환영하는 것도 이 속에 담겨있는 다양한 지적 성과들의 공유, 상이한 시각의 이해, 역사적 상상력, 문명론적 문제의식이 그 자체로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박명규 (서울대 교수·사회학)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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