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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리퍼트 효과와 '공직자 의식'에 주목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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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온 국민이 걱정했던 ‘주한 미국대사 피습사건’이 빠르게 수습되며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상황의 수훈갑은 단연 피해자인 마크 리퍼트 대사다. 경동맥 1㎝ 앞까지 칼날이 파고든 치명적 공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국민들을 위로하며 의연함을 보인 그의 모습으로 한·미동맹은 오히려 강화되는 분위기다. 국민은 자발적으로 ‘사랑해요 리퍼트’라는 피켓을 들었고, 정파를 초월해 그의 쾌유를 기원하고 있다. 일본을 두둔하는 듯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차관의 발언에 격앙됐던 대미 여론도 쏙 들어갔다. 이런 모습이 실시간으로 미국에 전해지면서 미국인들도 리퍼트 대사를 공격한 김기종씨가 결코 한국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됐다.

 리퍼트 대사도 자신의 목에서 분수처럼 콸콸 솟구치는 피를 본 순간 엄청난 공포를 느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가 이내 그런 공포를 극복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인 건 그의 뇌리에 각인된 ‘미국의 공직자’란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퍼트 대사는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난 괜찮다”고 주변을 안심시켰고, 생사를 넘나든 수술이 끝나자마자 한국민에게 “같이 갑시다”란 메시지를 날렸다. 피격 한나절 만에 재개된 리퍼트의 공공외교에 한국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었고, 미국은 헤아리기 힘든 외교적 실익을 챙겼다. 공직자 한 사람이 어떤 의식을 갖고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국가적 위기도 해소될 수 있음을 리퍼트는 몸으로 보여 줬다.

 이런 공직자가 나오는 데서 미국의 저력을 본다. 어떤 위기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하는 문화, 감정 대신 합리적 사고를 강조하는 교육, 시민의식과 애국심이 체질화된 국가적 토양 등 미국이 보유한 엄청난 소프트파워 자산이 리퍼트의 의연한 처신에 녹아 있다. 대사 6명이 살해됐을 만큼 험준한 국제환경을 관리하며 100년 가까이 글로벌 리더십을 지켜온 미국 외교의 경륜도 리퍼트의 처신에 DNA로 작용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도 위기에 굴하지 않고 본분에 충실했던 공직자들이 적지 않다. 1975년 사이공 함락 직전 교민을 한 명이라도 더 철수시키려고 동분서주하다 월맹군에 체포됐지만 전향을 거부해 5년 가까이 억류된 이대용 중앙정보부 공사나 95년 대만에서 괴한의 칼에 중상을 입었음에도 곧 업무에 복귀한 이수존 외교부 서기관이 대표적이다.

 지금 한국의 덩치와 국제적 지위는 그때와는 비할 수 없이 높아졌다. 정부는 높아진 국격에 걸맞은 공직자 양성을 위해 고시(考試)로 인재를 엄선하고 2년간 해외 연수를 보내는 등 많은 투자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키워진 공직자들이 위기상황에서 리퍼트나 이 공사 같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곧 1주년을 맞을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공직자들의 무능과 무사안일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우리 공직사회,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가 리퍼트 같은 공직자를 배출한 미국의 힘을 주목하고 무엇부터 고쳐 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