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시리즈는 「무위자연」의 화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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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설초 이종우선생이 타게한지 벌써 3년이 지났다. 그 3주기를 기념하는 회고전이 현재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서관에서 베풀어지고 있다. 60년전 파리로 미술수학을 떠났을때 그곳에서 제작한 소묘 등 습작들과 한국인으로선 처음 입선하여 코레앙의 예술잠재를 파리장에게 알렸던 『인형있는 정물』 그리고 만년의 북한산시리즈 등이 전시되고 있다.
잘 숨어있는 자가 잘 사는 자라는 근대의 인격처럼 이종우선생은 생전에 숨겨진 부분이 많았던 화가였다.
남처럼 미술계의 표면으로 드러나서 화려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성공에 대한 집념으로 분수에 넘치는 몸짓을 보이는 법도 없었다. 필자가 경험한 설초는 40년전이나 40년후나 늘 같은 설초였다. 그래서 분류와 변모의 극성을 불가피한 기구수단으로 삼는 비평가들에겐 관심밖의 예술가형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관심을 범용이라는 대명사로 위장해 보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설초는 감정이 잔뜩 들어차 있으면서 무엇도 표현하지 못한다는 기형의 화가는 아니었다.
온갖 속기를 교묘히 위장하면서 예술지상을 어리석은 관중들에게 강요한다는 건 있을수 없었다.
설초는 그 자체가 실체였고, 비록 「읊지않는 시인」이었지만 시인의 복형을 실체적으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신비하지도, 기막히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던 화가였다.
미술은 물론 작품을 가리킨다. 작품이 아닌 미술은 있으나 마나한 것에 불과하다. 만년의 설초는 북한산일대의 풍경을 많이 그렸다. 그것은 서양화는 아니었다. 물감이나 붓같은 자료는 서양의 것을 사용했지만 그리는 법은 철두철미하게 동양식으로 그렸다. 그것은 그야말로 무위자연으로서의 풍경화같은 것이었다. 이른바 격이 없는 격의 화풍이었다. 붓의 운필이라든가 자연의 구성 등이 준법과 삼원법으로 응용되어 있었다.
설초는 춘곡 고의동의 뒤를 이어 동경미술학교에 유학, 김관호·나혜석과 함께 한국에 서양화를 심은 선구자다.
그가 중앙고보미술교사로 있을때 미술반 전용의 특과교실이 있던 본관건물이 불탔다. 이곳에는 표범의 외피를 두른 서양청년의 나상을 비롯한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파리유학시절에 그린 걸작들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모두 불타 없어졌다. 실의에 빠진 설초는 이때부터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고, 그때 「막걸리」란 별명까지 붙었다.
만년엔 「무위자연」을 강하게 연상시키는 동양화 같은 풍경화를 즐겨 그렸다. 이 그림을 대하면 그분의 깊은 심성을 읽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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