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국회] 교원평가 더 이상 스승도 권위도 없단 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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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평가는 무엇을 평가하는가?

1. 노동자로서의 교사

교사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평가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논객들이 많다.

교사는 노동자임을 가정하자.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고용주로부터 “평가”를 받는다. 그가 서비스 하는 고객들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그가 그의 고용주로부터 주어진 임무를 성실히 효율적으로 수행했는지에 대해 고객들로부터 평가받지 않는다. 노동자를 평가하는 것은 어디 까지나 고용주의 권한이고 몫이다.

교사를 노동자로 간주하게 되면 , 그 고용주는 도대체 무엇일까?

국공립학교들과 사립학교가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일단 사립학교들의 교사들을 그 재단의 주인이 고용한 노동자로 보고 논의를 시작하자.

사립학교 운영자는 이윤을 목적으로 그 학교를 경영한다. 만일 그가 다른 목적 예를 들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 교육 “사업”을 한다고 하거나, 또는 인재 양성을 위하여

“교육 사업”에 “헌신”한다고 주장하면 , 자유 시장 경제에서의 시장 참여자들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는 “자기 이익 극대화”가 다른 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고려 대상이다.

경영자는 자기 이익 극대화가 최우선 고려 사항이고 “인재 양성”이나 “백년대계”는 단지 부차적이거나 부수적 고려 대상이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인재를 양성하게 되면

그것은 더 좋긴 하지만 , 인재를 양성하지 못해도 자기 이익을 챙길 수 있으면 그로 대 만족이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평가하려고 하고 실제로 평가하고 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평가하는 궁극적인 잣대는 그 노동자가 그 고용주의 자기 이익 추구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잣대는 이 “이윤 추"라는 잣대 앞에서는 달빛 아래 반딧불처럼 그 빛을 잃어 버린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 대해 정부나 사회가 간여하는 경우는 없다.

고용주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재량껏 노동자들을 평가하고 싶어 하고 ,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기업은 일종의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독재 체제이다.

기업은 그 체제가 “상명하달” 체제 즉 스탈린주의가 지배하는 전제정이다. 기업의 구성원인 노동자들은 “구성원”으로 취급받지 않고 , 그 기업의 “자산”(즉 노예)로 취급받거나 “비용(cost)”으로 취급된다.

기업 내에서도 “하의상달”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 그것은 어디까지나 노동자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이거나 고객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서 독재자인 고용주가 원해서 하는 일종의 고용주의 자기 이익 극대화 전략일 뿐이다.

고용주는 노동자의 “서비스”에 대한 고객들의 평가를 보고 싶어 한다. 고용주가 모든 노동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고용주에게는 참으로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고, 그의 이윤 극대화 전략에 심각한 장애물로 나타난다. 전지전능한 자가 되지 못 하는 게 고용주에게는 천추의 한이다. 그는 고객들의 평가를 보고 노동자들의 실적을 평가하는 잣대의 하나로 삼고자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이윤 극대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일 따름이다.

그러나 , 고용주의 이윤 극대화 전략은 각 고용주마다 다를 수 있다. 국가가 나서서 고용주보고 노동자를 평가하는 일괄적 방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 될 것이고 , 이는 앞으로 고용주와 국가 간의 관계에 자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2. 스승으로서의 교사

옛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제자는 스승을 믿고 따라야 할 존재, 스승과 제자는 “신뢰의 관계”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배운다는 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 배움의 끝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면 그에 대한 고생과 설움을 감내해야 될 이유가 학생에게는 전혀 없다. 믿고 존경하지 않는데,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하고 시간과 노력과 청춘을 헌납한단 말인가?

스승을 평가하는 제자란 어불성설이다. 스승이 아무리 엉뚱하고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시켜도 묵묵히 따르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다. 어찌 감히 스승을 평가하겠는가?

스승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어떠한 권위도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권위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의 영향은 심대하고 파장은 넓게 퍼질 것이다.

판사나 검사들도 그 “권위”에 의해 그들의 판결이 용납되고 수긍되어 왔지만 , 더 이상 이제 그런 권위는 설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고용주의 권위도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끝이 날 것이다. 박용성이가 불구속 기소를 받아도 국민이 침묵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국민이 고용주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이상 디폴트 권위는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의 권위가 무너지면 다른 권위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완회시키는 방안으로

'권위'나 다른 여러 제도들을 발달시켜 왔다. 조선시대는 주로 권위와 도덕 , 관습에 의하여 체제가 지탱되어졋다. 법은 비록 고도로 발달하긴 했었지만 , 사회 통제의 주된 수단은 아니엇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늑대와 눅대의 관계'는 아니었다. 그 결과 조선 시대에는 사회 시스템이 낭비적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제 한국 사회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사회로 막 접어들려 하고 있다. 모든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벌거벗은 이운 추구 , '이익과 이익의 충돌' 시대로 접어들려 한다. 더 이상 스승도 없고 권위도 없다. [디지털국회 한찬욱]

(이 글은 인터넷 중앙일보에 게시된 회원의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중앙일보의 논조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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