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6)|제80화 한일회담(95)|양국관계 개선위해 중개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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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회에 공개한 나와 「기시」 수상의 극비면담에 대해 최근 일본에서도 이를 기록한 글이 한 학술논문에 발표됐다고 한다.
일본국제정치학회가 펴내는 학술기관지 『국제정치』제75호 (1983년10월)에 평론가 「야마모또씨는『한일관계와 시차일부』란 논문을 발표했다. 「야마모또」씨는 「야쓰기」 씨가한일관계의 이면에서 활약한 사실과 그 역할을 논하면서 「야쓰기」씨와의 회견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유태하씨와의 접촉만이 아니고 후에 주일대사·외무부장관을 지낸김동조씨가 당시(56∼57년) 외무부 정무국장으로서 한일교섭의 책임자의 지위에 있었는데「야쓰기 씨는 그를 비밀리에 「기시」 수상과 회담하도록 했다는것이다.
57년께의 일이라고 「야쓰기」씨는 말한다. 이로부터 「야쓰기」·「기시」 라인의 한국측 인맥중에는 김씨가 들어가게된 것이다.
유씨와 「야쓰기」씨및 「기시」수상과의 인연과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 두 일본인은 그 후에도 한일관계에 음양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잠시 내가 아는 그들간의 연을 살펴보겠다.
82년에사망한「야쓰기」씨는 일개의노동자로부터 입신해 1930년대부터 일본노동분쟁을 조정하는 명수로 자리를 확고히 했다.
그후 그는 중일전쟁과 2차대전중에는 일본육군성 촉탁으로 군고의층의 인사문제나 군당국의 시책등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다시피하여 일본에서는 재야의 「최대의 거물」로 알려져있다. 전시의 동조내각을 타도하고 소기내각을 세운것도 「야쓰기」 씨의 역할이 컸다고하며 종전시의 영목내각의각료명단도 그가 작성한것이 거의 그대로 실현됐다는 세평을 들을만큼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다고 들었다.
극동전범재판에서 소련대표는 그를전범으로 처단하려고 무던히도 추궁했으나 「국책연구회」 이외의 활동에는증거가 드러나지 않아 결국 6개월간 거의 매일 타전범에 대한 증인으로만 불려다니고 기소를 면했다는것이다.
전후 「야쓰기」씨는 「국책연구회」를부활, 정계·재계·학계에 인맥을 형성해 예나 다름없이 막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60년 미일안보파동으로 「기시」수상이 퇴진하면서「이께다」씨를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그 사실을 처음으로 「이께다」씨에게 알린것도 「야쓰기」씨였다.
「기시」 수상과 「야쓰기」씨의 관계는일본이 괴뢰만주국을 세워 대륙경영에 나섰을 때로부터 소급해간다. 총무장관으로 만주국의 실권을 장악했던 「기시」씨가 그 경영책을 둘러싸고 일본군부와 대립했을 때 「야쓰기」씨는 양자간의 분규를 배후에서 조정하면서 「기시」씨에게 유리하게 해결해 줌으로써 양자의 깊은 관계가 싹텄다고 한다.
「야쓰기」씨는 패전후 「기시」씨가 A급 전범으로 수감됐을때 그 가족을 돌보아주어 두사람의 관계는 끊으려야 끊을수 없게 밀착됐다고 듣고있다.
그런「야쓰기」씨가 56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일관계에 개입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그는56년8월 「이시이」 자민당총무회장을 단장으로한 방중단에 끼여 대북에 가서 장개석자유중국총통을 만났다.
장총통은 이때 조속한 한일국교정상화의 필요성을 역설, 『일본은 무엇보다도 한국이 일본에대해 가진 의혹을 풀어주도록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설득했고, 이에 감명을 받은「야쓰기」 씨는 귀국후 「기시」씨와 이문제를 협의했다고 한다.
「기시」씨는 「야쓰기」씨에게 한일관계를 타개하기 위해 막후에서 일해줄것을 부탁하면서 유태하참사관을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야쓰기」 씨는 「기시」씨와 유참사관을 왕래하면서 그 중개역할을 충실히 했고 이런 인간관계에서 내가 「기시」수상을 면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나중에 상술하겠지만 제4차 한일회담이 막 시작된 58년5월 「야쓰기」씨가「기시」수상의개인특사로 한국을 방문, 이대통령에게 사죄하는 한배경이 되며 82년 병사할 때까지 그는한일관계의 막후인물로 시종했던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기시」수상은 자신의 집권동안 한일회담을 타결해 국교정상화를 실현시키겠다고 나에게 결의를 밝혔지만 그 실현은 내가 주일대표부대사로서 제7차 한일회담의 수석대표일때 그의실제「사또」수상의 손으로 결국 이루어졌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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