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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배반의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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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그래서 열흘 전만 해도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방문을 받고 "여러분은 나의 정치적 계승자"라고 말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숨가쁜 반발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김 전 대통령은 "세상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있고, 별일 다 있다. 그런 세상을 살아왔다"는 식으로 돌려 말하긴 했지만 거기에서는 몸서리쳐지는 배반감이 짙게 묻어난다.

하지만 그 배반감은 지금 국민이 느끼는 배반감, 아니 그 배반감을 넘어선 허탈감에 결코 비할 바가 못된다. 어차피 작금의 한국 정치는 배반의 악순환이다. 하지만 자신이야말로 불법 도청의 최대 피해자였다고 늘상 말해 왔던 김 전 대통령의 치세에 자그마치 1800명이 넘는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인 도청이 행해졌다는 사실 앞에서 지금 국민이 느끼는 당혹감과 허탈감은 정치적 배반의 감정을 훌쩍 넘는 일이다.

이런 와중에 김 전 대통령과 민주당이 모여 앉아 이번 사태를 놓고 'DJ 죽이기'니 뭐니 하며 항변하고 반발하는 것은 전혀 적절치 못한 일이다. 특히 민주당과 김 전 대통령이 이번 일을 놓고 탄압받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며 여론과 민심의 반전을 기대할 성질의 일도 결코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은 불법도청과 관련해 "살다 보면 별일 다 있다"고 객쩍은 소리로 말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진심으로 "부덕의 소치다"라는 말 한마디라도 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김 전 대통령은 "사실이 아닌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항변했다. 정녕 검찰이 없는 일을 만들었단 말인가? 나중에 가서 구차하게 "아래서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몰랐다"고 발뺌할 일은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

또한 열린우리당은 DJ의 극도로 불편한 심기로 요동칠 정국의 향방을 우려한 나머지 재빨리 호남 민심을 살피며 뒤늦게 구속의 형평성을 따지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것마냥 어울리지 않고 속보이는 일이다. 한나라당도 공소시효가 지난 일이라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YS 시절의 안기부 미림팀에 의한 불법 도청에 대해 진심으로 고해성사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옳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국회는 이 와중에도 민심 표계산 할 때가 아니라 다시는 이 땅에서 불법 도청은 없어야 한다는 것을 한목소리로 결의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청와대 역시 참여정부 들어서도 그치지 않는 불법 도청에 대한 의혹을 해소하는 노력을 그 어떤 과거사 청산보다도 앞세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어야 했다.

불법 도청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진짜로 사악한 일이다. 결코 용납돼선 안 된다. 여기에 정치논리를 섞어 물타기하고 그것도 모자라 또다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편승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절대 안 된다.

말이 1800여 명에 대한 불법 도청이지 그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들어간다. 더구나 그 불법 도청 대상자들과 통화한 사람까지 포함해 본다면 이 땅에 살면서 그 누구도 도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김 전 대통령의 오른팔, 왼팔 하던 박지원씨도 예외가 아니었지 않은가. 현직 대통령만 빼놓고 모두 도청 대상자였던 셈이다. 노벨평화상 받은 대통령 밑에서 그런 일들이 자행됐다니 이런 배반감이 또 어디 있을까? 도대체 대한민국 국민은 언제까지 이 속절없는 배반의 시대를 살아내야 한단 말인가.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