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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공동 채권시장 구축의 필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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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런 측면에서 현재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는 국가재활에 대한 수많은 논의가 동아시아 발전에 미칠 영향을 간과한 채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작금의 현실을 살펴보면 아시아 국가들의 상호 의존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입장에서 무역 상대국에 따라 얼마나 수출이 집중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인'수출집적도'를 통해 동아시아의 무역관계를 조감해 보자.

일본의 경우 한국 등 동아시아 5개국과 미국을 합친 6개 국가 중에서 한국에 대한 수출집적도가 가장 높다. 그 뒤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4개국과 중국이 따르고 있고, 미국은 관계가 가장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일본과의 관계가 가장 깊고 그 다음이 한국, 미국, 아세안 4개국 순이다.

한국의 경우 수출 및 수입에서 상위 3개 대상 국가가 중국, 일본, 아세안 4개국으로 모두 동아시아 국가들이다.

한마디로 한.중.일 3국은 수출에서 그 어느 나라보다 서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긴밀한 관계는 미국의 경상수지와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의 외환보유액 간의 연결고리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2000년 이후 급격히 증가해 2004년 말 현재 무려 6660억 달러를 기록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정부의 해외 발행 채권 가운데 절반 이상을 일본.중국과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미국이 경상수지 적자를 동아시아 국가들의 채권투자로 메우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2005년 3월 말 현재 미국 채권 등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8377억 달러에 달한다. 중국이 6591억 달러를 보유해 2위에 올라 있고 그 다음이 대만.한국.홍콩 등의 순이다.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합치면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3분의 2를 웃돌 정도다.

한마디로 미국 경상적자의 상당 부분이 아시아 국가들의 저축에 의해 보충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축적된 자금은 자금 중개상들을 통해 미국으로 흘러들고 있다. 이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은 다시 아시아 지역에 투자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자금중개가 아시아 지역 밖에 있는 금융기관과 결제기구들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 같은 상황이 심화될 경우 동아시아의 자금중개 기능이 고사될 우려마저 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전 총리와 태국의 탁신 친나왓 총리 등이 주창한 '아시아 채권시장'의 구축은 이 지역 발전을 위해 시사하는 바가 심대하다.

동아시아 채권시장의 규모는 대략 10조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전 세계 채권시장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 지역에서 최대의 채권시장 보유국은 일본이다. 시장 규모가 8조 달러에 이르며 양적인 성장을 거듭해 나가고 있다.

일본 다음으로 큰 시장은 중국이며, 그 다음이 한국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채권시장은 저마다 미국의 라이벌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채권시장은 지역 내 다른 나라와 단절돼 있다. 이 같은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동아시아에서 축적된 장기자본의 효과적인 분배와 효율적인 자금순환을 가능케 하는'공동시장'을 구축해야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채권시장을 들여다보면 덩치에 비해 구성이 너무 단순하다. 가장 큰 시장인 일본의 경우 거의 80%에 달하는 부분이 정부와 공공부문 발행 채권으로 메워져 있다. 약 20%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금융회사와 기업이 발행한 민간 발행 채권이다.

규모에서 한국에 버금가는 중국 채권시장도 거의 모든 발행 채권이 공공기관채로 이뤄져 있다.

한국의 경우 일본과 달리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다. 국내 금융 및 자본시장에 걸맞은 제도를 개선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결과 회사채와 금융채, 그리고 국공채의 비중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전체 발행 채권 가운데 회사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말레이시아와 한국.홍콩.대만 등의 순으로 높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규모와 이들 국가가 은행권에 집중된 간접금융 시스템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 이들 국가들의 회사채 시장을 포함한 민간부문 채권시장은 강한 성장을 시현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제 21세기 동아시아 금융 공동시장을 왜, 또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를 보자.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특히 한국과 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은 위기 방지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2000년 아세안 국가들과 일본.중국.한국 등이 합의한 치앙마이 선언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전문가들은 아시아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겪었던 이유 중 하나가 개별 국가들의 풍부한 저축(자금)을 역내에 순환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위기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채권 및 금융시장을 만들어 아시아의 자금이 장기적으로 역내에 투자될 수 있게 해 서로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시아 채권시장'의 구축은 지금까지 금융 당국이나 중앙은행, 그리고 정치인들에 의해 주로 주창돼 왔다. 앞으로는 정책입안자들과의 협력 아래 시장 참여자들과 금융기관들의 역할이 강화돼야 한다.

특히 일본의 방대한 채권시장을 감안할 때 일본의 시장 참여자들과 기업들이 동아시아 금융 및 자본시장의 중추로서 국내 금융 및 자본시장을 개혁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 사회.경제적 발전을 위해서는 시장 강화 노력과 더불어 다양한 제도적 기반을 포함한 보편적이며 통합된 지역 시장 인프라 구축이 함께 추진돼야 할 것이다. 그 핵심은 각국의 증권거래 및 결제에 관한 공동의 지역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과 금융 및 자본시장 규제에 관한 공동의 원칙을 정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노력을 통해 '아시아 스탠더드'라 불릴 수 있는 공동의 시장지배 원칙이 구축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누카이 시게이토 일본종합연구개발기구(NIRA)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