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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독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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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AI(일명 조류독감)에 밀려 관심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원조 독감은 무시무시한 병이다. 사상 최대의 희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은 1918년 초여름 프랑스 주둔 미군 병영에서 시작했다. 처음엔 별 증세가 없어 주의를 끌지 않았다. 첫 사망자가 나온 건 8월. 이때는 이미 전염성이 강해졌고, 치명적이었다.

한 달 뒤엔 바다를 건너 미국까지 갔다. 9월 12일 매사추세츠 병영에서 첫 환자가 생긴 지 보름 만에 1만2604명의 군인이 병상 신세를 져야 했다. 곧 보스턴 인구의 10%가 감염돼 그중 3분의 2가 숨졌다. 다시 한 달 뒤엔 미국인 20%가 재앙을 맞았다. 미군 사망자만 2만4000명. 제1차 세계대전 중 죽거나 다친 미군이 3만4000명인 것에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것도 예고편에 불과했다. 이듬해 봄, 영국에서만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 세계 사망자는 2100만~2500만 명, 흑사병 이후 최대였다. 독감의 재앙을 피한 곳은 세인트헬레나.뉴기니 등 태평양의 몇몇 작은 섬들뿐이었다.

독감 백신 개발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야 이뤄졌다. 백신 발명자 에드워드 제너가 1796년 '우두 접종'에 성공한 지 150년이 지나서다. 제너의 '우두 접종'은 뿌리가 중국이다. 18세기 한의(漢醫)들은 천연두를 앓는 사람의 고름을 뾰족한 침으로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종두(種痘)법을 썼다. 종두법은 중국 주재 영국 공사의 부인 메어리 워틀리 먼터규의 글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종두 접종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늘자 미국에선 격렬한 찬반론이 일었다.

아들을 천연두로 잃은 벤저민 프랭클린은 예방접종 옹호론자였다. 그는 런던의 한 병원 자료를 홍보에 사용했다. 이 병원에선 1758년에 1601건의 예방 접종을 했는데, 사망자는 6명뿐이었다. 같은 기간 천연두에 걸린 환자는 3856명, 그중 1002명이 숨졌다.

프랭클린은 "성공 확률이 2대 1만 돼도 예방 접종을 해야 한다"며 "신께서 인류를 축복하기 위해 기꺼이 허락하신 이 발견의 산물을 감사히 활용할 뿐 결코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감의 계절이다. 백신 접종은 이달 중순이 마감이다. 이때를 넘기면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 한다. 이런저런 일과 이유들로 아직 예방 접종을 하지 않았다면 서두르는 게 좋겠다. 혹여 '신의 은총'을 거부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정재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