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인간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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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시인 미당의 시‘국화 옆에서’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인간이라는 종(種)의 생명을 꽃 피우기 위해 장구한 지구 진화의 역사가 있던 것일까? ‘조상 이야기’를 펴낸 생물학의 거장 리처드 도킨스의 대답을 들어보자. 또 있다. “철학아, 길 비켜라. 우리가 나가신다”면서 인간을 말하기 시작한 생물학의 주요저서들에도 함께 귀 기울여보자.

얼마 전 영국과 미국의 잡지인 '프로스펙스'와 '포린 폴리시'가 독자 투표를 통해 세계 지성들의 순위를 매겨 발표한 일이 있었다.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인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1위로 뽑혔고, 리처드 도킨스가 3위였다. 이제는 과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기적 유전자'로 우리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도킨스의 영향력이 이제 전통적인 생물학의 범주를 뛰어넘었다는 증거다.

도킨스는 현재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과학대중화 석좌교수'로서 연구논문을 쓰기보다는 대중을 과학화하기 위한 저술과 강연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기회에 털어놓거니와 과학대중화 석좌교수제는 내가 벌써 몇 년째 정부를 향해 애걸하고 있는 제도다. 서양의 유수 대학들은 한결같이 '그들만의 도킨스'를 갖고 있다. 우리가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이 시점에, 그리고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우리 과학자들이 연일 세계적인 업적을 올리고 있는 이 마당에 언제까지나 대중을 무지의 수렁에 빠뜨려둘 것인가. 과학을 알고 향유하는 이들과 과학 문맹들간의 격차를 줄여줄 '과학의 민주화 운동'이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하다.

도킨스의 임무가 대중에게 과학을 알리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의 책을 가장 많이 사서 읽는 사람들은 생물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 몸담고 있는 동료 과학자들과 이른바 지성인들이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는 21세기 학문이 추구하는 '통섭(統攝)'(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용어로 '종합학문'을 뜻함)의 전도사이다. 20세기 내내 학문은 세분화 과정을 거치며 환원주의(사물의 궁극적 원인 내지 토대를 찾아 쪼개들어가려는 노력) 일변도로 치달았다. 하지만 21세기로 접어들며 우리는 드디어 부분에 관한 세부적인 연구 결과들을 아무리 꿰어 맞춰도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1세기는 학자와 일반인간의 소통은 물론, 학자간의 상호이해가 무엇보다도 절실한 시기이다.

도킨스의 신간 '조상 이야기'(까치 펴냄, 이한음 옮김, 3만2000원)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책이다. 생명의 기원은 생물학자들만 관심을 가질 주제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는 화학자, 천체물리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화와 인간 문명을 연구하는 여러 분야의 인문학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주제일 것이다. 인문학자들을 의식한 듯 저자는 영시(英詩)의 아버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구성을 본따서 이 책을 썼다. 다만 초서의 이야기처럼 순례자들이 한꺼번에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순례자가 생명의 기원을 찾아 역사를 거스르며 다른 순례자들을 랑데부하며 '공통 조상'을 찾아내는 형식을 취했다.

도킨스가 이처럼 역사를 거꾸로 추적하는 형식을 취한 까닭은 진화가 결코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그 점이 중요하다. 진화는 결코 우리 인간을 그 정점에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과정이 아니다. 시인 미당 서정주의 표현을 빌린다면, 인간이라는 한 종의 동물을 꽃 피우기 위해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그처럼 울어댄 것도 아니고 소쩍새가 밤마다 울어댄 것도 아니다. 학문적 입장이 서로 달라 평생을 도킨스와 으르렁대고 지내던 하버드 대학의 고생물학자인 고(故) 스티븐 제이 굴드도 이 점에 관한 한 도킨스와 완벽하게 동의한다. 굴드는 그의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지구 생명의 역사를 찍은 영화를 만일 다시 찍는다고 할 때 마지막 장면에 인간이 또 다시 등장할 확률은 거의 완벽하게 제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화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벌어진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의 결과로 운 좋게 등장한 동물이다. 도킨스는 이 책에서 39번의 우연한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기사를 전달한다. 생명의 진원지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랑데부 하는 존재는 단연 침팬지다. 그런 다음 고릴라.오랑우탄 등의 영장류를 만나고 파충류.양서류.어류 등을 거치며 무척추동물과 미생물에 이르는 순례는 고조선과 발해로 거슬러올라가는 우리의 역사 못지않게 흥미진진하다. 도킨스 자신의 표현대로 순례는 경건함과 경외심마저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명의 기원을 추적한 제임스 왓슨의 'DNA: 생명의 비밀'과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생명을 꽃 피운 행성인 지구의 일대기에 관한 책, 리처드 포티의 '살아있는 지구의 역사'를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도킨스와 함께 우리의 조상을 찾아가는 여행 가방에 이 두 권의 책을 함께 챙겨 가면 좋을 것 같다. 공교롭게도 이 세 권은 모두 이한음이라는 부지런한 과학도가 공들여 번역한 책들이다. 이 땅의 과학대중화에는 이한음과 같은 과학전문번역가의 공이 더할 수 없이 크다.

최재천(서울대 교수.생명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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