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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마카오은행 대북 거래금지' 반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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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6자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차관보가 6자회담 이틀째인 10일 베이징의 호텔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베이징 로이터=뉴시스]

사흘 예정의 5차 6자회담이 이틀 만에 암초를 만났다. 북한이 10일 '마카오 은행 문제'를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거칠게 비난하며 정상적 회담 진행에 회의감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신뢰 회복을 위해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북한의 이런 주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회담 관계자들 사이에선 "단순한 압박 수단"이라는 판단에서부터 "심각하다"는 수준까지 견해가 갈린다.

정부 관계자는 일단 "미국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은 북한이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특유의 벼랑 끝 전술을 시작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측 6자회담 수석대표가 북.미 양자 접촉 후 "북한은 비핵화 문제를 푸는 데 매우 고의적인 지연술을 펴고 있다"고 말한 게 이 대목을 염두에 둔 것이란 지적이다. 힐 수석대표는 전날 밤 김계관 북측 수석대표와 단둘이 만났다. 자정을 넘겨 호텔로 돌아오며 기자들에게 "북한은 공동성명에 포함돼 있지 않거나 우리가 함께 다룰 수 없는 요소들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회담이 파국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게 회담장 안팎의 대체적 분위기다. 우리 측 대표단 관계자는 "이번 회담은 어차피 탐색전"이라며 "합의에 이르는 긴 과정의 단지 높은 파도"라고 표현했다. 일부에선 "북한이 신뢰구축 방안의 하나로 '계좌 폐쇄 조치 철회' 정도를 요구하려는 것 아니냐"고 진단했다.

북한이 이날 오후 남북, 북.중 양자접촉에 예정대로 나선 점을 볼 때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려는 뜻은 없다는 전망이 나온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난달 말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 방북 때 "예정대로 5차 6자회담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던 점도 회담 지속의 근거로 꼽힌다.

◆ 신뢰구축 방안엔 한.미도 이견=힐 수석대표는 이날 오전 회담장으로 향하며 "바로 지금이 북한이 영변 원자로 가동과 핵 재처리를 중단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9.19 공동성명 이후 계속 영변 원자로를 가동하고 있는데, 우려스러운 일"이라며 "상황을 사실상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시간 같은 회담장으로 떠나는 송민순 우리 측 수석대표는 "영변 핵시설이 적절한 방법으로 중단되고, 폐기로 가는 과정을 어떻게 가속화할지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는 "신뢰구축을 위해 초기 단계에 취할 조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같은 공동성명의 해석을 놓고 한.미의 접근법은 이처럼 달랐다.

한.미 수석대표는 이날 동시에 "합의사항에 충실한 게 가장 좋은 신뢰구축 방안"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미측은 북한이 즉각 핵폐기에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우리 측은 핵 재처리 중단이나 영변 원자로 가동중단 등 초기단계 조치에도 상응 조치를 찾겠다는 주장이다.

베이징=최상연 기자

북 반발 '마카오 은행'은

북한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마카오 계좌' 문제는 제4차 2단계 회담 직전인 9월 초 불거졌다.

미국 사법 당국이 북한의 위조 지폐, 마약 등과 관련된 혐의로 중국계 은행들을 조사 중이라는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SJ)의 9월 8일자 보도가 시초였다. 같은 달 15일 미국 재무부가 "북한이 마카오에 있는 중국계 은행 '방코 델타 아시아'를 통해 위조 달러 지폐를 유통시키고 불법 국제거래 대금을 세탁해 왔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미 재무부는 "이 은행이 20년 이상 북한 정부기관과 그 간판 회사들(Front Companies)에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 왔으며, 북한의 기관과 회사 일부는 불법 행위에 연루된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이후 이 은행은 미 국내법에 따라 '돈세탁 우선 우려' 대상으로 지정됐다. 미국이 8월 아시아와 연계된 국제 밀매조직을 적발하고 모두 4600만 달러(약 460억원) 상당의 위조 지폐 및 가짜 담배, 무기 등을 압수하면서 북한-마카오 커넥션의 증거를 입수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 재무부의 발표 이후 이틀간 이 은행 자본금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이 대량 인출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그러자 마카오 정부가 이 은행의 관리에 참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마카오 의회는 10월 28일 돈세탁 방지법을 통과시켜 이 은행의 돈세탁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북한은 이런 미국과 마카오 정부의 조치를 자신들의 자금줄을 차단하려는 압박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지난 10월 18일 이 문제가 6자회담 공동 성명 이행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이미 예고했었다. 외무성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와의 문답에서 "미국이 최근 우리의 그 무슨 '마약 거래, 화폐 위조 등 불법 거래설'에 대해 떠들며 우리의 합법적인 금융거래를 차단하는 제재 조치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조치를 선전포고로 간주할 것"이라고도 했다.

서승욱 기자

미국이 보는 북한 위폐
"위조달러 수입 연 2000만 달러 대량살상무기 만드는 데 사용"

북한이 위조 달러의 유력한 출처로 국제사회의 지목을 받게 된 건 1990년대 초부터다. 경제난이 심각해지자 마약 밀매, 외교공관을 통한 밀수와 함께 위폐 제조에 나섰다는 게 한.미 정보당국의 판단이다.

국가정보원은 99년 10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북한의 위폐와 관련해 구체적인 사항을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북한은 최신 위폐 감별기로도 식별이 어려운 위폐(일명 수퍼노트)를 제조했다. 또 외교관과 고위간부를 통해 해외에 유통시켰다. '2월은빛무역회사' 등 3개의 위폐제조기관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앞서 국정원은 98년 11월 정보위에서 "북한이 해외에 유통시키려다 적발된 위폐가 94년 이후 13회에 걸쳐 460만 달러 이상"이라고 구체적인 규모까지 밝혔다. 98년 4월 노동당 국제부 부부장이던 길재경은 초정밀 위폐 3만 달러를 환전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각됐고, 96년 12월에는 루마니아 주재 북한대사관 무역참사 김철호가 위폐 5만 달러를 유통시키다 체포됐다. 또 몽골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 김철민과 몽골.북한 합작회사인 모란상사의 박창룡은 위폐 11만7300달러를 유통시키다 적발됐다는 것이다.

북한산 위조 달러는 국내에도 유입됐다는 게 관계당국의 판단이다. 외환위기 때인 97년 12월부터 98년 8월 사이에는 국내에서 발견된 22만 달러의 위조 달러 중 3만7000달러가 북한에서 제조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99년 이후 국정원은 북한의 위조 달러와 관련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 정부 이후 남북화해 분위기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을 여전히 위조 달러의 온상으로 간주한다.

미 의회조사국의 라파엘 펄 연구원은 5월 "북한이 위폐로 연간 1500만~2000만 달러가량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며 "외화 수요에 따라 늘어가는 상황"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이 위조 달러를 이용해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를 만들고 있다고 본다.

과거 북한 위폐와 관련해 일치된 정보판단을 했던 한.미 당국이 최근 들어서는 미묘한 입장 차를 보이고 있다. 한국 정부 내 일각에서 북한 위폐 정보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등 미국과 온도 차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정보 관계자는 10일 "국가 차원에서 위조 달러 제조에 나섰을 경우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며 "북한도 이런 점을 노려 국제사회에서 위폐 제조국으로서의 오명을 씻으려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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