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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최호중 전 부총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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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1990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소 수교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최호중 외무부 장관(오른쪽)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 그는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를 최전선에서 뒷받침했던 ‘북방장관’이었다. [중앙포토]

노태우 정부시절 ‘북방외교’라는 이름으로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및 중국과 수교가 이뤄졌다. 미국과의 동맹에 기초한 한국의 반공(反共)외교가 전세계로 확대되는 획기적 전략 변화였다. 당시 외무부 장관으로 ‘북방장관’이라 불렸던 최호중(사진) 전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이 19일 별세했다. 85세.

 최 전 부총리의 빈소는 한국 외교를 수놓았던 인사들로 가득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이병기 국정원장,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 현역 인사들은 물론 이정빈·이상옥·송민순·김성한·공로명·윤영관 전 장관 등 역대 외교장관들이 빈소를 찾았다. 방명록에는 이홍구 전 국무총리, 정몽준 전 의원,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의 이름도 보였다. 빈소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눈에 띄었다.

 정태익 전 주러시아 대사는 “당시 북방정책의 성공으로 헝가리·체코 등 동구권과 수교가 봇물 터지듯 했다”며 “북방외교의 백미(白眉)는 소련과의 수교(1990년)였는데 최 장관께서 소련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교장관과 수교 서명을 하던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 장관이 활약하던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반은 우리 외교사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며 “당시의 복잡했던 외교환경을 잘 이끄신 분”이라고 평가했다.

 최 전 부총리도 평소 북방외교를 가장 큰 업적으로 생각했다. 최 전 부총리는 2004년 회고록 『외교는 춤춘다』에서 “외교장관 시절 공산·비동맹 진영을 포함하는 ‘전방위 외교’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 가장 보람있었다”며 “전 부총리보다는 전 외무부 장관으로 불리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했다.

 소련과 수교 이후 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할 때 최 전 부총리는 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으로 있었다. 통일원 장관이 부총리로 격상된 후 첫 장관이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소련 방문을 성사시키는 등 북방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점이 인정됐다. 지금도 남북관계의 핵심 합의로 간주되는 남북 기본합의서(남북한 상호 체제인정과 상호불가침, 남북한 교류 및 협력 확대안)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최 전 부총리의 손을 거쳐갔다. 남북기본합의사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한국과 소련 수교 이후 국제정세의 변화에 부담을 느낀 북한이 남한과 대화에 나서면서 맺어진 북방외교의 결실이기도 했다.

 89년 최 전 부총리의 수행비서를 했던 김홍균 청와대 국가안보실 정책조정비서관은 “늘 여유가 있으시면서도 일처리를 꼼꼼하게 하시던 분”이라며 “북방외교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철학이 있으셨고 ‘북방외교가 우리 외교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회고했다.

 88년부터 3년간 최 전 부총리 보좌관을 맡았던 임성준 전 캐나다 대사는 “외교관 시절 30년간 가장 신나게 일했던 때가 최 장관과 함께 일했던 시절”이라며 “노래도 잘하시고 약주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셨다”고 말했다. 그는 “외교부뿐 아니라, 상공부와 통일부에도 근무하던, 다재다능한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최 전 부총리는 고등고시 행정과(7회)에 합격해 56년 외무부에 들어왔다. 외무부에서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경제·정무 차관보 등으로, 84년에는 상공부 차관으로 일했다. 이후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거쳐 88~90년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재임기간 동안 소련 등 동구권 국가를 비롯해 모두 18개국과 수교를 이뤄냈다. 90∼92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맡았다. 퇴임 후에는 통일원 통일고문,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한국외교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장례는 외교부장(葬)으로 치르며 유족으로는 부인 김우명 여사와 아들 재식, 현식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 발인은 23일 오전 9시다. 장지는 경기 파주시 통일동산. 

정원엽·안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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