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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끊긴 외갓집 제사 안동김씨가 400년 모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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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안동김씨가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는 배경을 설명한 '추원록(追遠錄)'의 첫 장. '무릇 집안에는 내외의 선조가 계시니…' 로 시작된다. [문경 새재박물관 제공]

외동아들이 일찍 죽어 대가 끊긴 집안의 외손들이 400여 년째 변함없이 외할아버지 제사를 올리고 있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 사는 안동김씨 계공랑파 집안 10여 명은 3일 마을에서 3㎞쯤 떨어진 대하리 산중턱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다. 해마다 햇곡식으로 음식을 마련해 음력 시월 초이틀에 올리는 묘제(墓祭)다. 400여 년째 이어지는 집안의 중요 행사라 연장자인 김동렬(77)씨가 초헌을 맡았다. 그러나 묘의 주인공은 안동김씨가 아니다. 조선 중기인 16세기 후반 이웃 마을에 살았던 장수황씨 부부의 무덤이다. 묘제에 참석했던 17대손 김일묵(44)씨는 "이 무덤은 까마득한 윗대 외할아버지의 묘소"라며 "그 외할아버지의 아드님이 후사를 잇지 못해 외손인 우리가 제사를 지낸다"고 설명했다.

장수황씨는 딸 부부에게 재산은 물론 묘소 관리와 제물 준비에 쓸 수 있도록 토지까지 물려 주었다. 안동김씨 사위는 그때부터 처가 제사를 지냈다. 이후 종중계(宗中契)도 구성되고 제사를 지내는 내력을 적어 문서로도 남겼다. 현재도 토지는 3000평이 전해지고 있어 안동김씨는 여기서 나온 수익으로 제사를 준비한다는 것. 또 종중계를 열기 위해 안동김씨 집안은 지금도 정월보름과 여름 복날 등 일년에 두 차례 모인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4일부터 문경 새재박물관이 전시 중인 '평산신씨 묘 출토 복식전'을 통해 알려졌다.

지난해 3월 묘를 이장하면서 미라로 발견된 평산신씨는 바로 안동김씨가 제사를 지내는 장수황씨의 부인이었다. 평산신씨 무덤에선 치마.저고리 등 복식 유물 70여 점이 무더기로 나왔다. 안동김씨는 지난해 외할머니로 밝혀진 평산신씨 유해를 합장했다.

새재박물관은 출토 복식과 함께 외손들이 제사 지내는 사연을 담은 '추원록(追遠錄)' 등 안동김씨 집안에 전해지는 고문서 40여 점을 같이 전시했다. 추원록엔 '우리 외고조부는 살림이 조금 넉넉하셨으나 하나뿐인 아들이 죽자 달리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제사를 지내는 범절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고 적혀 있다.

새재박물관 안태현(38) 학예연구사는 "조선 중기만 해도 자손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지내는 외손 봉사 제도가 있었다"며 "이번 전시는 그런 문화를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당시는 재산 분배도 아들.딸이 공평해 오늘날 남녀 평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덧붙였다.

문경=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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