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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학성 이씨(글 이춘성 기자 사진 김택현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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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학성은 울산의 옛이름이다. 물좋고 산좋아 군학의 서식처였던데서 이름을 얻었으리라. 이곳을 근거지로 가문을 일으킨 학성이씨는 전국에 l만5천여명, 희성에 든다. 시조는 학파이예
(1373∼l445년). 이예는 려말 이성계의 새 왕조가 들어서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낙향, 지금의 울산에 터를 잡았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은거했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 명군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새시대가 열렸다. 그는 생각을 고쳤다.
당시 울산은 왜구의 침입을 자주받아 민심이 흉흉하고 백성들의 괴로움이 컸다. 이예는 이웃의 괴로움을 덜고자 했다.통신사로 나서 왜와의 40여차례에 걸친 왕래외교에서 맹활약했다. 그 공으로 세종3년(1421년)조정으로부터 충무공의 시호와 함께 공패를 하사 받았다. 특히 세종25년(1443년) 계해조약(삼포조약) 체결당시에는 신숙주 변중문과 함께 대표로 참석했다.
왜구의 침경을 왜가 스스로 단속하도록 했다. 울산등 동·남해안 주민들이 비로소 편한 잠을 잘수있었다.

<"벼슬말라" 가르쳐>
이예는 이같은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이외에 무기개발에도 업적을 남긴 발명가였다. 대포제작에 필수재료로 알려졌던 동대신 수철을 재료로 사용하는 법을 고안,무기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늘 폭력으로 정권을 쥔 이성계쿠데타의 쓰라린 경험이 남았다. 후송들에게는 벼슬길보다 선비로서 조용히 살것을 유언했다. 선조의 가르침을 받아 후세에 벼슬보다 학문과 예술에서 더 빛을 냈다.
학파의 두아들중 종근은 문의현감 양근군부를 지냈고 종실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3차례의 대마도 원정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후일 3세에 이르러 5파로 분파 청량파 월진파 서면파 곡강파가 5백여년째 대를 이어 온다.
충무공의 현손 이린은 중종5년 삼포왜란때 커다란 전공을 세워 검중구에 올랐다. 임진왜란때 학성이씨는 「6의사」를 배출. 충의가문의 전통을 세운다.
이경연은 임란이 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정유재란때는 홍의장군 곽재석을 따라 경남창녕의 하왕산성전투에 참가, 큰 공을 세워 경성판관에 임명되었다 .선무원종훈이등에 녹봉되고 나이들어 수직(노인에게 주는 명예직)으로 동화중구부사를 받았다.
이인상 역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많은 전투에서 왜적과 분전 큰공을 세우고 도산 싸움에서 장렬히 전사, 순국했다.
난은 이한남도 의병장으로 활약한 전공으로 선무원종훈삼등에 오르고 용상위복호군에 제수됐다.

<이휴정기로 유명>
또 이겸수 겸익형제는 당시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의 정세탕정에 큰공을 거두어 형인 겸수는 기장현감 정주판관을 제수받았고 후일 남강사에 모셔졌으며, 동생 겸익은 군자감참봉·봉사를 지내다 현종때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6의사」가운데 또 하나의 별 순의 이봉수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고 진중에서 순국, 선무일등으로 녹봉되었다. 이밖에도 이설 이찬백 이수인 이경용 이경양등이 임란에 활약, 향중에서 「일문다의사충절」이란 칭송을 들었다.
현종때의 대문장가 이휴정 이동영은 임란때 공을세운 난은 이한남의 손자. 이휴정은 국난에 전공을 세워 관직을 받고도 이를 사양하고 초야에 묻혀 자연과함께 노닐었던 할아버지 난은의 뜻을기려 현종3년(1662년)봄 태화강변에 정자를 지었다. 이름하여 이휴정.. 『아, 나같이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경치를 사랑하는 타고난 버릇이 나이가 들수록 더해만 가는구나. 가산이나 세간의 욕심을 다 뿌리치고 세상사 아랑곳없이 이 적막한 곳에 몸을 던지는 것은 그뜻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가 지어 남긴 「이휴정기」는 세속의 영리를 떠나 자연속에 몰입코자했던 그의 심경을 말해주는 명문.
「학이」는 대봉·이휴정외에도 이양오·관오형제와 이준민같은 문장가들을 배출, 문향학성의 명성을 이어왔다..
「학이」는 또 충효를 가훈삼아 영조조의 이의현형제같은 당대의 효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해방후 「학이」는 정계·법조계·학계등 사회각계에서 많은 인재를 냈다.
그중 가장 알려진 이름은 제3공화국의 주역가운데 한사람인 이후락씨. 중앙정보부장과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내며 공화당 18년 정권의 중추로 활약했다.
이채주(동아일보편집국장), 이증(MBC청룡단장 전MBC보도제작부국장)씨등은 현재 언론계에서 활약하는 학성이씨.
학계엔 이수건(영남대) 이수봉(충남대), 이장의(서울대), 이윤수(경북대), 이인의(경북대), 이채해(동국대)교수등이었다.
변호사 이수원(전부산지법판사), 이재목(전서울고검검사), 이창락씨등은 법조계의 인재들.

<여말전 기록없어>
발상지 울산근방에 대부분이 몰려살아 울산에 종친회총본부를 두고있는 학성이씨는 최근 종친회간부듈을 중심으로 선조인 학파 이의 전적을 찾는 「뿌리찾기운동」을 벌이고 있다.학파의 낙향에는 「불사이군」의 충정이 담겨 있으나 그 이전의 사실이 기록에 없어 확인할방도가 없는 것. 이예가 려말 충신포 정몽주의 외조카란 설이 있고, 또 안악이씨와의 관련설등이 있어 뜻있는 학성이씨 종친회간부들은 이를 확인할 역사적 자료를 찾고 있다.
▲다음주는 「영산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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