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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대통령 전남대 강연 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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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의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모시고 오늘 이렇게 말씀 드릴 기회 갖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사실 저는 오늘 제 마음에 있는 많은 얘기를 하기보다 여러분들이 제게 가지고 있는 의문들에 대해 답변을 잘 드리려고 한다.그래서 질문을 많이 받으려고 하는데 다소 위험부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훨씬 더 여러분들께 실감있게 다가가는 방법인 것 같아 말씀을 짧게 드리고 질문 기회를 드릴 것이다.다만 질문이란 것은 많은 분들과 공감을 함께 하는 것이라야 하고... 단결하고 해서 다른 분들과 함께 질문 답변이 공유되어야만 의미있게 진행되는 것이지 혹시 잘못하면 많은 분들을 짜증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질문을 다듬어서 해주시면 하는 답변을 드린다.

고심하고 있는 한두가지 문제만 말씀드리겠다.

저는 부산에서 맨처음 구속된 학생들 변론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한 다리를 걸치게 됐다.왜 잡혀갔느냐고 물어보니 광주학살의 진상을 부산시민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했다는 게 가장 큰 죄목이었다.

그 때부터 광주는 우리의 문제가 됐다.우리는 87년 6월항쟁까지 노래도 하고 했는데 첫째가 '임을 위한 행진곡' 그 다음이 '5월의 노래' 다음이 '출정가' 그런 노래였고,열몇개는 바로 부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6월 항쟁까지 이르렀다.그 이후 주제가 노동문제로 돌아가고 당이 갈라지면서 정치적.지역적 갈등 문제로 넘어갔지만 부산에서 6월 항쟁할 때까진 주제를 광주로 했다.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90년 김영삼 당시 총재가 여당과 당을 합칠 때 굳이 남았던 것은 저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3당 합당은 호남 지역을 제외한 전지역의 연대 결과가 되므로 그것이 고립화 구도를 만들어서는 수습할 수 없는 문제를 안게 될 것이라는 것도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광주 5월 항쟁 그 당시에 핵심적 정신이라고 할 자유와 정의.민주주의는 조금씩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 같다.

함께 표현되지 않고 여러분 가슴속에 담겨있던 또 하나의 항쟁의 이유는 소외와 차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그것은 한 지역으로만 중심으로 보면 소외와 차별이나 국가적 관점에선 분열과 대립이다.

분열된 정치구조를 가지고 불신하고 그래서 정치적 이득을 얻는 대단히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구조 문제가 지금도 살아 있다.저는 그래서 정의와 민주주의 문제는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되 참여정부 기간 동안 반드시 성취하고 싶은 것은 대립과 갈등 구조를 극복하는 것이다.

광주.전남 시민들을 이해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3월 16일 광주에서 제가 가장 높은 1위를 하게 해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그 때 여러분들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여러분이 부여해준 시대의 책임과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분열과 차별과 소외,그 대립과 갈등,불신과 증오 이런 것들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길 그것을 뛰어넘어 국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저의 큰 직무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다.

많은 의문이 제기되나 지금 하나 느끼는 것은 난감하다는 것이다.사실 김영삼 정부 시절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고 싶다.김대중 정부가 극복하고자 했으나 못한 것을 해결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갖고 있는데 저도 정부를 인수하고 출발해 보니 김영삼 정부 처음에 나타난 것과 같은 현상이 일부 나타나고 있고 김대중 정권 초반에 나타난 현상 역시 나타났다는데 당혹해 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여러 일을 했지만 그 중 한가지 박철언씨를 본인이 했든 검찰이 했든 감옥으로 보내는 일이 있었다.이후 대구.경북은 김영삼 정권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임기 5년 내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그런 방향으로 가버렸다.

그 후로 국정 운영이 힘들어졌다.비슷한 시기에 부산에서 영도다리 밑에 손가락이 떠돌아 다닌다는 얘기들이 재밌게 회자됐는데 그것도 김영삼 정부에 치명적인 부담이 됐을 것이다.

김대중 정부 내내 영남이 마음을 열지 않았다.무슨 일을 하더라도 결코 수용하지 않았다.그래서 정책 수용이 어려웠다.몇몇을 요직에 기용해도 변함이 없었다.

아마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 부산에서 보궐선거 그때 지원유세 가서 제가 했던 얘기가 '여러분이 김영삼 시절에 몇사람이 요직에 갔느냐.

1천명이 갔냐 1만명이 갔냐.만일 1천명이 김영삼 덕분에 요직 가서 재미를 봤다면 영화를 누렸다면 부산시민 여러분 4천명 중 한사람이 재미를 본 겁니다.다음에 1만명이라면 4백명 중 한사람 재미를 본 겁니다.재미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시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호남이 다 해먹는다니 해먹으면 얼마나 해먹겠냐.몇사람 덕보고 손해를 본다는 것이냐'고 질문하고,'누가 부산사람이냐.30년전 중학교 졸업하고 서울 가서 부산이 뭘하는지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도 부산사람이고 자기 아버지가 부산이어서 본적이 돼 있으면 신문에 부산사람으로 나오는데 그게 그렇게 소중하냐'고 질문했는데 내내 결국 부산사람들의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했다.편중인사라는 것을 극복하지 못했다.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정말 누구의 오해도 생기지 않게 다시 이런 것으로 해서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망이다.저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지만 지금 시점에 느끼는 불안감이 그러한 것이다.

두번째로는 신정부증후군이란 게 있는 것 같다.전 정부에서 일하던 사람을 조사해 잡아넣는 것 있고 청와대가 나서서 사정이라고 해서 공직자 기강을 잡느라고 골프 얘기가 나오고 하는데 외국에서 보니 우리 정부의 그것이 크게 화제되고 있는 현상이 일어난다.신정권초기증후군 같다.

정치인 조사,사실 저는 그걸 바라지 않았다.청와대서 공직자 윤리강령을 만들어 하려고 하는 생각은 사실 없었다.오히려 공직자들의 윤리에 관한 문제는 부처별로 자기들이 토론해서 지킬 수 있는 규칙을 만들어내고 스스로 자기들이 만든 규칙을 스스로 지켜나가게 하자.자율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이라야 스스로 승복하고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부패방지위원회에서 윤리 강령을 만들어 권고했다.

부처 내부 토론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모르나 별로 없었던 것 같다.그러면서 오히려 놀랍게도 제가 당황하고 있다는 거지요.그렇게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는다.내부에서 스스로 자발적 동력이 생기고 투명한 공직사회,투명한 정치가 생겼으면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과거 성공하지 못했던 정책이 다시...대체되고 있어 불안을 느끼고 있다.

노무현 많이 변한 것 같다고 그러는데 그렇다.저는 끊임없이 변해 왔다.재야서 민주화 투쟁할 때 오로지 문제 제기하고 비판적 관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국회의원 됐을 때 초선 때도 꿋꿋한 정치활동했다.

당의 중진되고부터는 대안 생각하고 대안 만들어서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려고 생각했다.대통령이 되고 나서 보니까 이건 중진으로서 대안 생각해 본다는 게 아니라 시시각각 선택하는 자리라서 역시 제 스스로 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한다.이번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돌아오면서 옛날을 생각해봤다.

중학교 때 카운셀러 선생님이었던 조광제 선생님이 어느날 수업에 들어와 ...라는 사람이 중세교회의 시대에 당연히 종교적 교리는 천동설임에도 불구하고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사형당해 죽었다.그 때 지동설을 포기하라고 했는데 포기 않고 죽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역시 지동설을 신봉하고 발견했는데 종교재판서 부인하고 천동설을 수용하고 살아 나오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두 사람 삶을 비교해보라고 했는데 알아들을 능력이 그 땐 없었다.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두개 다 삶의 형식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하고 대통령하기 전까지는 ..쪽을 좀더 존중하고 선호하는 쪽이었다.최명길과 윤상헌 그것도 역사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논쟁인데.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세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한신장군은 어릴 때 우리에게 그것도 어릴 때 동네 불안한 아이들에게 고개 숙이고 가랭이 낀 분 있었다는 얘기 곧잘 한다.모순된 것이지만 우리 삶의 본보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제게도 이런 문제가 어려움 주는 것 같다.

큰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최선을 다하겠다.여러분이 대통령으로 만들어줬다.이제 제가 취임한 지 80일 남짓이어 제게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기왕 실패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버텼던 제 의지를 쉽게 꺾지 않겠다.

여러분은 알 것이다.대선 직전에 정몽준 후보와 저 사이에서 있던 팽팽한 갈등을. 결국 저를 지지하고 기대거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결코 질 수 없는 선거였으나 이기더라도 발목을 잡혀 할 일 할 수 없는 대통령은 끝내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망시킬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일찌감치 실망시키는 게 낫다.

실패한 대통령보다 실패한 후보가 낫다.호락호락 추구해온 가치를 포기하지 않겠다.여러분과 함께했던 90년 이후 정치적 격변에서 마음에 담아뒀던 화해와 통합,이 목표는 결코 제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최선을 다하겠다.(박수)

[다음은 일문일답]

-미국 방문을 마치고 왔는데 방미 기간중 대통령 말 비춰 시민단체나 네티즌,한총련을 비롯한 대학가의 비판이 일고 있다.후보자 시절 말과 방미기간중 말씀 간에 차이가 많이 있다.자칫 이런 부분은 대통령 지지자나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줄 수 있다.그런데 대통령이 미국 갔다 온 다음에 명확한 언급이 없는 걸로 안다.

"내 생각에는 별로 차이가 있는 것 같지 않다.그렇게 대등한 한미관계,소파 개정 등등에 관해 후보 때 얘기했을 것이다.지금은 대등한 한미관계,소파 개정도 중요하나 당장 발등에 떨어진 것은 핵 처리다.북핵 문제 ..한미간 동맹관계에 대한 불안과 의문도 해소하고 그 다음 그와 같은 불안에서 비롯되는 경제에 대한 불안과 불신도 해소해서 북핵 이후 여러 문제 풀어갈 토대 마련이 1차적으로 급했다.

당선 직후에 '선 핵 후소파'라고 했다.한꺼번에 할 방법이 없는 것 같더라.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이 너무 쉽게 너무 빨리 무력적 수단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않도록 하는 것이다.그로 인해 한반도에 전쟁이 있거나 올 것만 같은 불안이 팽배한 것을 막는 것이 1차적 목표였다.그 무게는 두번째 세번째보다 몇배나 무겁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대해 여러가지 평가를 갖고 있다.부분적으로 많은 부분에 있어서 불만 가질 일도 있다.그러나 한미관계라는 것은 여전히 우호적인 공조관계를 가져가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 위에 있다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대통령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미관계가 사사건건 갈등과 대립으로 충돌이 생기면 북핵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한반도에 곧 전쟁이나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과 혼란 상황이 생길수밖에 없을 것 같고,한국정부와 한미관계가 조율이 안돼 반한 감정을 미국이 갖고 유사한 분위기에서 주한미군 문제를 들먹거리면 대통령과 국민 사이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다는 게 제가 판단한 현실이다.미국이 두려운 게 아니라 한국의 국민이 우선 두려웠다.

주한미군 얘기만 나오면 도저히 합리적 대화나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고 금방 불안감으로 휩쓸려 버리는.물론 전국민이 그렇게 판단하는 게 아니라 휨쓸려가는 분위기가 있어 한미관계는 매끄럽게 가야 한다.국제적 관계서도 그렇게 가야 하고 국내에서도 지도력을 올바로 행사하기 위해서도 정부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잘할려고 미국 갔는데 듣기 좋은 소리해야지 가서 기분 나쁜 소리만 자꾸 하고 다닐 일은 아니지 않나 생각하고 기분좋게 하고 실제로 관계를 돈독히 하기로 약속하고 왔다.여러 시정해야 할 일은 필요에 따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너무 비관적으로 생각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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