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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기획 위기의 '기능 한국'] 3. 선진국선 "기능인 자랑스럽다" 가업 물려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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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이탈리아에서는 직업전문학교가 기능인 양성을 맡고 있다. 메란주립직업전문학교 목공반 학생들이 실습시간에 가구 제작 방법을 배우고 있다.

'기술의 뿌리'인 기능인력의 부족현상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럽.일본 등 선진국들도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들 국가는 직업전문학교 등을 통해 인력을 육성하고, 기능인 우대 풍토를 조성해 어려움을 넘고 있다. 취재팀은 지난 9월 이탈리아.프랑스.일본의 기능인 양성 현장을 둘러봤다.

이탈리아·프랑스에선

알프스 산맥이 포근히 감싸고 있는 이탈리아 북부지역 사우스티롤의 메란시. 사과와 포도 농장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전원마을(인구 3만5000명)에서 '젊음의 향기'가 흘러나온다. 세 동의 건물 안 실습실에서 학생들은 최신 장비를 갖고 목공.금속.패션.전기 등 갖가지 기술을 익히느라 비지땀을 흘린다. 이곳은 메란주립직업전문학교. 이탈리아 수공업 중심지인 사우스티롤의 주정부가 운영하는 17개 직업전문학교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자, 오늘은 의자를 만들어 보자."

25년 경력의 안드레아스 피에르(57) 교사가 톱질 방법을 설명하자 목공반 학생 17명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줄리아(16.여)는 "세계적인 명품 가구를 만들고 싶어 일반고교 대신 직업학교를 선택했다"며 신나게 톱질을 했다. 바로 옆 교실에선 의상 실습이 한창이다. 재봉틀을 돌리던 피르커 야스민(20)은 "대학 졸업장이 없어도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전문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의상반 학생들은 졸업 후 대부분 패션도시 밀라노에서 일한다.

1955년 설립된 메란주립직업전문학교는 목공.건축.위생설비.제지.요리.자동차 정비 등 10여 개 과정을 운영한다. 880명(14~21세)의 학생이 2~3년간 기술을 익힌 뒤 100% 취업한다. 공업계 고교가 없는 이탈리아에서는 직업전문학교가 기능인력 양성을 맡고 있다. 가구.피혁.공예품 등 수공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춘 이탈리아의 힘이 직업학교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6월 핀란드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2003년 대회 때 처음으로 금메달 한 개를 땄던 나라가 무려 5개를 획득, 스위스.일본과 공동 1위(금메달 수 기준)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발전은 사우스티롤 수공업협회(LVH)와 주정부가 이끌었다. 사우스티롤 볼차노시에 본부를 둔 LVH는 8000개의 수공업체를 회원으로 둔 이탈리아의 대표적 직능단체. 정부를 대신해 기능인이 많은 사우스티롤 지역의 대표를 선발해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LVH의 헤르베르트 프리츠(72) 회장은 "직업학교에서 연간 2000여 명의 인력을 집중 배출하고 업체와 산학 협력을 강화한 게 결실을 보고 있다"며 "2년 뒤 일본 대회 때는 금메달 10개를 딸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직업학교 운영비는 주정부와 기업체가 지원해 학생들은 수업료가 무료다. 과정은 ▶현장 근무와 수업을 병행하는 산학 협력▶학교 내 직업훈련(각 3년)▶고교 졸업 후 연수(2년) 등 세 가지. 커리큘럼은 학교.기업체.주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짠다. 학생들을 바로 현장에 투입해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탈리아는 장인정신을 중시하는 전통 때문에 기능인을 높이 평가한다. 목공예 등 전통 가업을 계승할 경우 주정부가 세금을 40% 감면해 준다. 기능인의 54%가 창업을 하고, 창업주의 절반 이상이 가업을 물려줘 기술을 전승한다. 기능인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전문 기능인의 보수는 사무직보다 30%가량 높고, 일반 기능인도 대졸자와 거의 비슷하다. 간판이나 학벌보다 기술력을 높이 사는 것이다.

이탈리아에도 기능공 부족 현상은 있다. 그래서 정부는 10년 전부터 중3생들을 대상으로 직접 현장에서 일해보는 '수공업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기능인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 많은 학생들을 끌어들이자는 취지다. 안데르가센 사우스티롤 교육국장은 "2000년에는 중졸자의 23%가 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올해는 30%로 늘었다"며 그 효과를 설명했다.

프랑스도 직업고교를 통해 기능인을 양성한다. 파리 북부 교외 도시인 빌리에 르 벨에 있는 장인직업고등학교(IMA)는 자동차와 제빵 기술을 가르치는 특화된 기술학교다. 지난해 5월 개교식 때 참석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많은 중소기업이 기술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열심히 기술을 배우면 취업의 보증수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청년실업률이 높지만 중소기업은 오히려 기술인력이 모자라는 기현상을 직업고교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지원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 학교는 일반과목 80%와 실습 20%로 짜인 교내수업 외에 산업현장 실습을 특히 중요시한다.

학생들은 견습사원 계약을 하고 현장에서 일하며 월급도 받는다. 나이와 학년에 따라 월 304유로(약 40만원)에서 742유로를 받는다. 아드리앙 바릴(17)은 "적성을 맘껏 살릴 수 있고 돈도 벌어 좋다"고 했다. 프랑스에는 IMA와 같은 기술학교가 수도권 지역에만 140여 곳이 있다. 프랑스 전역의 등록학생은 36만여 명. 프랑스 정부는 이 숫자를 50만 명대로 끌어올려 부족한 기능인력을 메울 계획이다.

일본 기업 '덴소' 부설학교

"지이잉, 끼이익, 철커덩."

여기저기서 기계 다루는 소리가 요란하다. 정신을 집중하려는 듯 흰색.파란색 등 각양각색의 머리띠를 두른 30여 명의 학생이 금속 덩어리와 씨름하며 기술을 익힌다. 일본 아이치(愛知)현 안조(安城)시 덴소기연센터 직업학교. 세계 4대 자동차부품회사인 덴소(DENSO)가 개설한 학교다. 3년 과정인 공고와 우리나라 직업훈련원이나 기능대와 유사한 고등전문 1.2년 과정(각각 고졸자 대상), 종업원 기능교육 등 4개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필요한 기능인을 직접 키워 적재적소에 투입하자'는 회사 방침에 따라 1954년부터 단계적으로 과정을 마련했다.

"공고는 정규 고교 과정과 동일하고 입학과 동시에 봉급도 지급됩니다."

하기노 고이치(萩野幸一) 교장은 '입학=취업' 인센티브를 부여한 결과 신입생 확보에 애를 먹는 다른 공고와는 달리 매년 입학 경쟁률이 3대1을 넘는다고 설명했다. 고용 인원이 10만4100여 명에 이르는 덴소는 자체 교육기관을 통해 부족한 기능인을 육성하는 일본의 대표적 기업으로 꼽힌다. '산학 협력'을 뛰어넘어 직접 분야별 전문 기능인을 키워내는 완벽한 '산학 일치'를 이뤄내고 있는 것이다.

이 학교 출신 기능올림픽 수상자는 4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일정 기간 교사로 일하며 후배들에게 기술을 전수한다. 올 6월 핀란드 기능올림픽대회에서 전기 분야 동메달을 딴 기무라 쓰카사(25.木村司)는 "후배들이 국제대회에서 입상하는 것을 꼭 보고 현장으로 가 명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기능올림픽 1위 최슈크

"가업을 잇는 게 당연하지요."

핀란드 국제기능올림픽에서 전기설비 옥내배선 부문 금메달을 딴 이탈리아의 토마스 최슈크(22). 사우스티롤주 메란시에서 부친(47)이 운영하는 전기설비업체의 기능공으로 일하는 그는 "아버지한테 배운 기술로 1등을 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기술을 익힌 것은 고교를 졸업한 2001년부터. 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대학 진학을 생각했었지만, 세계 최고의 기능공이 되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전기회로도가 너무 신기했어요."

아들이 대학을 포기하자 '사각모'를 씌워주고 싶다던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았다. 간판보다는 아들의 특기와 적성을 살려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25년 경력의 전기배선 전문가인 아버지는 '개인교수'가 됐다. 매일 회로도와 씨름하며 아들을 가르치고 현장에 데리고 다녔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일까.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숙련공이 된 것이다. 마침내 최슈크는 지난해 12월 이탈리아 기능올림픽 대표로 뽑혔고 금메달을 땄다.

최슈크는 "포상금이나 스카우트 제의도 없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가문을 빛낸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며 웃었다.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는 가업 계승이 활발해 기초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 사우스티롤(이탈리아).빌리에 르 벨(프랑스).아이치(일본)=양영유.박경덕.민동기 기자

◆ 제보= 02-751-5656, 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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