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내 친구] 하. 국내 법 교육 실태와 대안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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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법대로 해."

우리나라에서 '법대로 하자'는 말은 대화와 타협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니 끝까지 싸우자는 의미로 통한다.

법무부가 5월 중.고교생 5200명을 상대로 법의식을 조사한 결과, 51%에 해당하는 2650명이 "'법대로 해결하자'는 말을 들을 때 몰인정하고 불쾌한 느낌이 든다"고 대답했다.

김대호 법무부 보호과장은 "학생 때 배우는 법 교육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보다는 의무와 강제를 부각하는 게 많고, 법에 대한 부정적 사례를 자주 거론하다 보니 이런 의식이 고착됐다"며 "새로운 접근방식의 법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 걸음마 단계인 법 교육=국내 법 교육은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법무부는 3월 법무부.대법원.교육자원부.학계.언론계 인사 등 14명으로 구성된 법교육위원회를 설립, 법 교육 관련 교육과정 및 법 교육 학습교재 개발 등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아직 시작에 불과하며 난제들이 적지 않다. 법 교육 위원인 서울대 박성혁(사회교육학과) 교수는 "생활에 필요한 실용적 법 지식을 전달하도록 법 교육 교과서를 바꾸고 '법과 사회' 한가지뿐인 교과서를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초.중학교에는 법 교육 과목이 별도로 없다. 초등학교 6학년과 중학교 2학년 과정에 일부 법 관련 부분이 들어 있으나 주로 국민으로서의 의무만을 강조하는 정치교육 성격을 띠고 있다.

1997년 확정된 7차 교육과정에 따라 2003년부터 고등학교 선택과목으로 개설된 '법과 사회'과목은 생활법 교육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교과서의 내용이 법률 지식을 전달하는 이론 위주의 법학개론을 답습,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법 교육은 전무한 실정이다. 법 교육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전문성 부족도 심각하다.

김영천 서울시립대 법정대학장은 "사범대 사회교육과에서 법 관련 2~3개 강좌를 수강한 교사들에게서 제대로 된 법 교육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교사에 대한 재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 민관이 함께 나서야=민간의 경우 전북대 법대 부설 법학연구소는 2002년 초부터 검찰청.도교육청의 협조를 받아 이 지역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생활법률 체험학교'라는 하루 일정의 법 교육을 해오고 있다. 오전 이론교육 시간에는 판.검사, 변호사, 경찰관 등을 초빙해 '중.고생이 알아야 할 법률 상식' 등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전주.군산 교도소 등을 견학하는 프로그램이다.

법학연구소 소장인 서거석 교수는 "교도소 견학 때 학생들이 감명을 많이 받는 것으로 볼 때 현장학습이 법 교육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법무부는 변호사협회 등 법률단체, 법학자, 판.검사, 변호사 등이 법 교육을 위해 협조체제를 구축하면 '법교육지원법'을 제정해 재정지원 등을 해줄 방침이다.

또 지난달 30일 '전국 고교생 생활법 경시대회'를 개최하는 등 법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모의재판 경연대회, 자료집 발간 등도 계획하고 있다.

10년째 자치법정 운영하는 민사고
학생 법관이 "벌점 3점" 땅 … 땅 … 땅

지난달 27일 열린 민족사관고 자치법정에서 판사와 검사, 변호사 역할을 하는 학생들이 규율을 위반한 학생을 상대로 재판을 벌이고 있다. 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김○○양은 방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 벌점 1~3점을 부과할 것을 요청합니다."(검사)

"김양이 이 규칙을 어긴 건 처음이므로 벌점을 주는 것은 지나칩니다. 집행유예해줄 것을 요구합니다."(변호사)

지난달 27일 오후 7시 강원도 횡성 민족사관학교 소강당에서 일주일에 한 차례 열리는 자치법정의 재판이 진행됐다. 판사석 앞에 선 피고인을 놓고 검사와 변호사 역할을 하는 학생이 팽팽하게 맞섰다. 수업 지각, 컴퓨터 규율 위반, 거짓말 등 각종 규칙을 어긴 학생 54명이 자신들이 뽑은 판사(명예위원)에게서 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생은 없었다.

이날 판사를 맡은 조희경(17.국제반)양은 "규율을 어겼는지 여부도 학생자치위원회에서 판단하기 때문에 사실상 100% 사법권을 학생이 갖고 있는 것"이라며 "학생 법정을 통해 우리가 합의한 규율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점을 모두가 깨닫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 주 동안 각종 규율을 위반한 학생과 벌점 등은 매주 수요일 교내에 게시되고, 해당 학생들은 '법무부'(회원 20명)에 해명을 하게 된다. 소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목요일 저녁 법정에 출석해 형을 선고받아야 한다.

민족사관고는 1996년 학교 설립 때부터 학생법정을 운영했다. 98년에는 명예위원회(법정 판사)와 법무부가 조직돼 학생들이 학교생활규칙과 벌칙을 자체적으로 부과하고 있다. 벌점은 1점(청소정돈 불량)부터 최고 퇴학요구(무단이탈)까지 다양하다. 벌점 누계가 10점 이상이 되면 매주 일요일 명심보감을 필사하는 벌을 받는다. 또 누계가 25점이 되면 학교 교무위에 통보돼 각종 장학혜택이나 대학 추천 등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엄세용 민족사관고 교감은 "스스로 규율을 만들고 그것을 지켜야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공유하는 공간이고, 처음부터 학생들의 자발적 의지가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강제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법교육위원회 성낙인 위원장
"법은 규범 아닌 생활 실용 지식 가르쳐야"

"사람이 태어나면 법에 따라 출생신고를, 죽으면 사망신고를 하는 것처럼 법은 우리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합니다. 이제는 무조건 지켜야 하는 강제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이 아니라 생활 속의 법률을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법무부 산하 법교육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성낙인(55.사진) 서울대 법대 학장은 "법 교육의 핵심은 국민이 생활 주변에서부터 능동적으로 법을 다룰 수 있게 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법 교육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 국민 사이에는 '법을 지키는 것이 손해'라는 법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돼 있다. 잘못된 법 교육이 이 같은 인식을 퍼뜨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이제는 법치주의가 강조되는 시대다. 이에 맞게 국민이 법을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법 경시 풍조가 생긴 원인은.

"대책 없이 서양 법 체제를 받아들이다 보니 동양적인 법 감정과 실정법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또 과거 위정자들 스스로가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점도 작용했다."

-우리나라 법 교육의 문제점은.

"전문성이 크게 떨어진다. 지금까지 초.중.고교 법 교육에서 판사.변호사.법학교수 등 법조인들이 참여할 공간이 거의 없었다. 일반 사회 과목을 공부한 교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실용적인 내용과는 거리가 먼 법률 지식 위주의 교육이 돼 왔다. 법을 공부할 기회도 너무 적어 법학 전공자가 아니면 법을 멀고 어렵게 느낀다."

-법 교육 활성화를 위한 활동 방향은.

"법 교육 담당 교사들의 전문성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와 법과대학.변호사협회 등을 일반인 법 교육에 참여시키는 방안을 연구개발할 계획이다."

특별취재팀=조강수.하재식.문병주 기자<pinej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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