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랏차차 '88세 청년'] 6. 아내 김영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필자의 결혼식 사진. 내 뒤에 서 있는 분이 형 중산(重山),신부 뒤가 장인이다. 장인은 키가 컸지만 내 형이 작아 보일까봐 한 단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1941년 9월 15일 결혼했다. 내 처의 이름은 김영호다. 나는 그해 2월 오사카(大阪)에서 그를 처음 본 순간 반해 버렸다. 그때 김영호의 나이는 17세. 이화여전 음악과 2년을 마치고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로 유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개성을 떠나기 전 처가의 주치의였던 오기환 선생이 장인에게 "교토제대 졸업반에 개성 출신 수재가 있는데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권했다고 한다. 내 장인(김기선)은 개성의 부호였다.

연락을 받은 나는 교복 차림으로 장인과 처가 묵고 있던 신오사카호텔로 찾아갔다. 마침 방학 중이었다. 그의 얼굴은 낯익었다. 방학 때 탁구 연습을 하러 간 호수돈여고 강당에서 본 얼굴이었다. 그는 피아노 교습을 받기 위해 방과 후 학교에 남아 있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오사카에서 만난 이튿날 장인과 아내는 교토를 관광했다. 내가 안내를 맡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내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운동 좋아하세요?" "…"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 겨우 들은 대답은 "빨리 가요"라는 한 마디뿐이었다.

교토에서 일을 마친 장인과 처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을 거쳐 개성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귀국길에 동행했다. 개성역에는 우리 가족이 연락을 받고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그때 기차에서 내리는 미래의 며느릿감을 처음으로 보았다.

장인은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금방 결혼시킬 생각은 없었다. 딸이 아직 어린 학생이니 서두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오후 11시쯤 장인을 찾아가 교토제대 성적표를 내놓았다. 전과목에 걸쳐 최고 점수인 우(優)였다. 장인은 그 자리에서 결혼을 승낙했다.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처도 일본에서 함께 공부한다는 조건이었다. 약혼식을 올린 2월 24일은 김영호의 생일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나는 외로운 유학생이 아니었다. 내 고향 개성에서 미래의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하숙방 책상에 약혼녀의 사진을 세워 놓고 공부했다. 사진을 보면 힘이 났다. 사진 속의 약혼녀는 "어서 오세요. 피곤하시지요"하고 위로하는 듯했다.

교토제대를 졸업한 뒤 개성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장인과의 약속과는 달리 교토제대 졸업 후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의 삼공제약 연구실 차장으로 취직한 직후였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이 회사에서 나는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식장은 호수돈여고 강당이었다. 강당을 결혼식장으로 사용한 건 우리 부부가 처음이었다. 주례는 임헌평 개성시장이 맡았다. 장인은 신부의 손을 잡고 나와 내게 인도했다. 흔치 않은 신식 결혼이라 한동안 화제가 됐다. 신혼여행도 없이 서울 대방동에 있는 내 회사 사택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올해로 64년째다. 그동안 처는 나의 '제1의 비서'였다. 서류 정리, 전화 메모, 손님 접대까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있었기에 오늘의 민관식이 있다고들 한다. 처는 서울 시내 두 곳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사업가다. 하지만 아내에게서 용돈을 타 쓰지는 않았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도 음식값은 반드시 현금으로 내가 계산한다.

순탄치만은 않은 삶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한시도 아내를 잊은 적이 없다. 에피소드 하나.

대한체육회장 시절, 나는 일본에 가서 후원금을 지원할 유력한 동포들을 수소문했다. 그들과 저녁식사를 하고 나오자 대기 중이던 차에 묘령의 아가씨가 타고 있었다. 나를 위로하려는 동포들의 배려였으리라. 그러나 나는 여자를 내리게 한 뒤 혼자 호텔로 돌아갔다. 귀국 후 만난 김종필씨가 말했다. 당시 그는 공화당의 실력자였다.

"'일혈(一穴)거사'께서 귀국하셨구먼. 정보 들었소. 존경합니다."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