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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이 부른 극우·극좌 … 중도 설 땅이 좁아진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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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호 03면

‘급진주의의 팽창.’ 다보스포럼(WEF·세계경제포럼)이 최근 내놓은 ‘29가지 세계변화’ 보고서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주제다. 종교적 극단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이 가장 두드러진 글로벌 현상이라는 것이다.

세력 확장하는 글로벌 급진주의

올 들어 프랑스 풍자주간지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 이슬람국가(IS)의 일본인 인질 2명 참수와 요르단 조종사 화형 등 잔혹한 살육이 끊이질 않고 있다. 9·11 테러를 주도했던 알카에다가 무색할 정도의 신형 이슬람 극단주의는 아랍권에서조차 지탄의 대상이 됐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후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는 유럽에서도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군소세력이었던 극좌·극우 등 급진 정당들은 주류 정치권을 압박할 정도로 세가 불었다. 최근엔 극좌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공산당 출신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Syriza)는 급기야 1월 총선에서 정권을 차지했다. 영국의 전 유럽장관 데니스 맥셰인은 “우리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 때 시작된 신자유주의와 부의 축적이라는 ‘30년 사이클’의 종착점에 도달했다”고 지적했다.

그리스뿐 아니다. 스페인의 포데모스당, 아일랜드의 신페인당 등 구제금융을 받았던 나라에서도 극단주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남유럽보다는 경제사정이 좀 낫기는 하지만 역시 장기침체를 겪고 있는 중·북부 유럽에선 관대한 이민정책에 반대하는 반유럽연합(EU) 성향의 극우정당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프랑스의 국민전선, 네덜란드의 자유당, 덴마크의 국민당, 스웨덴의 민주당, 핀란드의 ‘진짜 핀란드인’당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유럽의 기존 주류 정당들은 단순히 충격을 넘어 생존을 걱정할 처지가 돼버렸다.

사회안전망 무너지자 폭력의 역사 엄습
유럽 급진주의의 성장 배경에는 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반이민 등 배타적 민족주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찾아온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재정위기는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 등 특히 남유럽 국가들을 파탄에 빠뜨렸다.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수용한 강력한 긴축과 구조조정의 영향으로 일자리는 고갈돼 가고 복지혜택은 줄어드는 등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다. 급진 좌파가 승리한 그리스의 실업률은 25%나 된다. 청년실업률은 더욱 큰 문제다. 스페인 53%, 그리스 50%, 이탈리아 44%, 프랑스 25%다. 브뤼셀과 베를린이 주축이 되어 밀어붙인 긴축에 대한 적대감은 극단주의 세력을 불려주는 온상이 됐다.

미 컬럼비아대의 역사학자 마크 마조워는 『암흑의 대륙』이란 책에서 “유럽이 이전의 폭력적인 과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후에 갖춰진 사회안전망 덕분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파시즘과 민족주의 포퓰리즘을 이겨낸 원동력이었던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면서 다시 예전의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가 엄습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따지고 보면 IS와 알카에다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횡행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빈곤과 절망으로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무슬림들이 종교적 근본주의를 내세우는 극단주의 조직에 쉽게 빠져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독일·네덜란드·스웨덴 같은 북유럽의 재정지원국으로부터 강력한 긴축요구를 받고 있는 남유럽에선 특히 극좌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긴축에 따른 현실적 고통이 시장경제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저항을 촉발시켰으며, 자연히 이러한 논리를 대변하는 급진좌파에 유리한 국면이 전개된 것이다.

게다가 그리스 시리자의 전신인 공산당 등 남유럽의 극좌파 정당들은 이전에 연립정부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유권자들에게 현실적인 대안으로 선택됐을 수 있다. 극좌파는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제시하지 않는 극우파와는 달리 현실정치에서도 충분히 정책적으로 실행이 가능한 강령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북유럽 경제는 현상유지에 그치고 있지만 남쪽 EU 국가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경제개혁 등 구조적인 변화 요구도 덜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유럽 유권자들은 일자리·복지 축소 등 기회 상실에 대해 누군가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유럽 밖에서 최근 이주한 외부인들, 특히 무슬림들이 주요 타깃이 됐다. 극우 정당들은 경제보다는 사회·문화적인 이슈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뉴턴의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현실 세계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IS와 알카에다의 잔혹한 살육은 유럽에서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를 더욱 부추겨 무슬림 이민자 사회에 대한 경계심을 더욱 높여놨다. 독일의 ‘페기다(PEGIDA·유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 운동이 대표적이다. 페기다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이후 더욱 큰 동력을 얻어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에 반이슬람 정서를 확산시키고 있다.

줄어든 일자리, 이주 무슬림에 화풀이
프랑스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당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로 대표되는 암세포를 근절시켜야 한다”고 선동한다. 유럽의 대표적인 반이슬람 극우 정당인 네덜란드 자유당의 헤이르트 빌더스 당수는 “우리는 탈이슬람화에 나서야 하며 이슬람 국가로부터의 이민자 수용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빌더스는 솅겐조약으로 개방된 네덜란드의 국경을 다시 닫아야 하며 기차역과 쇼핑센터, 거리에 군병력을 배치하라고 요구한다. 이러한 유럽의 움직임에 이슬람권은 역으로 크게 반발한다. 이는 또다시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증오를 확대재생산하는 촉매가 된다. 극단이 극단을 부르고 있는 형국이다.

긴축과 문화충돌이 극단주의 발호의 외부적 요인이라면 주류 정당들의 무능은 내부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 후 유럽에선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의 국민 정당들이 유럽 정치를 압도적으로 지배해왔다. 이들이 극좌·극우 포퓰리스트들에게 안방을 내주게 된 것은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유권자들의 실망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기존 주류 정당들이 실질적인 대안이 되기에는 한계가 분명해졌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이제 유권자들은 일반 서민들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져 있고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사는 ‘권력지향적 특권 카스트’를 투표를 통해 징벌하겠다고 벼르게 된 것이다.

지난달 그리스의 선거 결과는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 올해엔 스페인·영국·포르투갈·덴마크 등 유럽 주요 8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실질 임금이 떨어지고 복지혜택이 대폭 축소된 나라에서 빈곤해진 유권자들이 대거 투표소로 달려가 기성 주류 정당들을 심판하는 일은 더 이상 시나리오만은 아니다. 시리자의 승리에 따른 그리스의 행보는 유럽 극단주의 득세의 중대 전환점이 되고 있다.

한경환 기자 helmu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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